이탈리아 매너리스트 화가 니콜로 델라바테가 그린 판도라.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사달을 일으킬 것 같은 눈빛이 인상적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
왜 이런 사달이 난 것일까.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와 그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인간을 만들라고 명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허락도 없이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어버렸다. 성질 나쁜 제우스가 이를 그냥 두고 볼 리 없다. 프로메테우스는 쇠사슬에 묶인 채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아 먹히는 신세가 되었고, 에피메테우스에게는 아름답지만 위험한 여성, 판도라를 아내로 주었다. 이탈리아 매너리스트 화가 니콜로 델라바테가 그린 판도라를 보라. 분명 아름답긴 한데, 어딘가 사달을 일으킬 것 같은 눈매를 가졌다.
판도라와 이브를 겹쳐 그린 프랑스 화가 장 쿠쟁의 작품. 비스듬히 누운 여인의 왼쪽에는 선악과가, 오른쪽에는 판도라의 항아리가 놓여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는 오랫동안 여성을 폄하하는 방식으로 읽혔다. 구약성서에서 이브가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먹었듯, 판도라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상자를 열었다는 해석이다. 여성이 이 세상의 불행을 초래했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나 2세기경의 기독교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판도라 신화를 이런 식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관점은 미술 작품에도 반영됐다. 프랑스 화가 장 쿠쟁은 판도라와 이브를 겹쳐 그렸다. 비스듬히 누운 여인의 왼쪽에는 선악과가, 오른쪽에는 판도라의 항아리가 놓여 있다.
17세기 화가 코르넬리스 블루마르트 2세의 판화.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둘러싸여 구경거리가 된 판도라를 표현했다. 사진 출처 산페르난도 왕립미술아카데미 |
모든 재앙에 대한 책임을 여성들에게 묻다니. 이런 해석은 무리가 있다. 굳이 책임의 소재를 따지자면,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 있지 않을까. 판도라에게 상자를 선물해 이 사태의 씨를 뿌린 제우스나, 애당초 제우스의 화를 돋운 프로메테우스에게 책임이 있지 않을까. 애꿎은 피조물 판도라가 어째서 이 세상 모든 재앙의 책임을 떠안아야 한단 말인가. 17세기 화가 코르넬리스 블루마르트 2세의 판화에 등장하는 판도라를 보라. 그는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둘러싸여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판도라는 신들의 노리갯감이었다. 그러니 책임질 일도 없고, 책임질 일이 없으니 반성할 일도 없다. 반성할 일이 없으니 얻을 교훈도 없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희망’에 대한 이야기로 재해석해 보자. 희망이 맨 마지막까지 판도라의 상자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희망은 재앙보다 느리다. 재앙이 없는 상황에서 희망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하다면 희망은 애당초 필요 없을 것이다. 이 점에 주목한 이들은, 희망이 있기에 인간은 끝내 좌절하지 않는 법이라고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를 해석해 왔다. 그런데 희망이 그토록 좋은 것이라면, 왜 온갖 재앙과 함께 같은 자리에 있었을까. 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혹시 희망도 재앙의 일종이 아닐까. ‘희망고문’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희망 때문에 인간은 포기를 모르고 포기를 모르기에 계속 재앙으로부터 고통받는다. 그렇다면 고통을 가져다주는 이 희망이란 것은 과연 마냥 좋은 것일까.
성해나의 소설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는 공포스러운 고문실을 설계하는 건축가가 등장한다. 그는 처음 고문실에 창을 내지 않으려 했다. “이 공간에 창을 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희망이 생기지 않습니까. 죽고자 하는 사람도 빛 속에선 의지와 열망을 키웁니다.” 그러나 그는 고심 끝에 단 10분만 빛이 들어오도록 하는 수직 창을 설계해 넣는다. 창문으로 잠시 스며든 빛이 “공간의 형태를 드러내 조사자에게 두려움을 심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 무력감을 안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희망이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창을 그렇게 설치한 것이다.
그것은 너무 부정적인 해석일까. 희망은 아무래도 긍정적인 것일까. 희망이 그렇게 좋은 것이었다면, 재앙 역시 상자 안에 있을 때는 좋은 것이었을 수 있다. 재앙이 재앙이 되는 것은 바로 상자 밖으로 나왔을 때부터다. 바이러스를 생각해 보자. 실험실이라는 ‘상자’ 안에서 엄격하게 통제된 바이러스는 전염병을 막는 백신이 되지만, 그 상자로부터 유출된 바이러스는 전염병을 일으킨다. 즉, 그 자체로 좋고 나쁜 것은 없다. 선과 악은 제어 여부에 달렸다. 이렇게 보면, 재앙이든 희망이든 제대로 제어되기만 하면 나쁠 것이 없다.
재앙을 세상에 풀어놓은 것은 판도라의 책임이 아니지만, 희망을 풀어놓은 것은 판도라의 책임이다. 재앙은 모르고 풀어주었지만, 희망은 알고서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즉, 희망만큼은 신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다. 인간 판도라는 결심한다. 이 무수한 재앙 때문에, 아니 이 무수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기로 말이다. 이제 인간은 희망을 가짐으로써 포기하지 않게 되고,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고통받게 될 것이다. 그 고통을 견디는 영광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끔 만든다. 그런 점에서 희망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건넸다는 불과 상통한다. 희망은 마음의 불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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