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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이후 달라진 나이 한 살의 의미[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동아일보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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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이제 곧 한 살이 늘어난다. 예전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일이다. 회사 다닐 때 나이는 농담처럼 오가던 주제였을 뿐, 삶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 퇴직을 하는 순간 달라졌다. 나이는 검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퇴직하고 제일 당황스러웠던 건 다름 아닌 내 나이였다.

채용 공고를 살필 때면 늘 심장이 쿵쾅거렸다. 자격 조건에서 경력 사항보다 나이 기준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게 되었다. 뭔가를 하려 하면 대부분 나이가 걸렸다. 면접이든 상담이든 이야기가 길어지기도 전에 내 나이부터 밝혀야 했다. 그때마다 느꼈다. 퇴직 후의 나는 지난날 이루었던 성과보다 살아온 햇수만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을.

동네 마트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러 간 적이 있다. 캐셔 모집이라는 게시물을 보고 이거다 싶었다. 직장에서 계산대 업무를 해 본 이력도 있고 상품을 다루는 데도 능숙해 일하는 데는 자신 있었다. 어렵사리 찾아간 나에게 매니저는 대뜸 몇 살인지를 물었다. 내가 답변하자 잠시 머뭇거렸다. “의외로 많으시네요.” 다른 대화는 전혀 없었다. 며칠을 기다렸지만 결국 연락은 오지 않았다.

구직 사이트를 통해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맘에 드는 곳이 있어 이력서를 보냈는데 끝내 아무런 답신을 받지 못했다. 나이 무관이라는 내용을 분명히 보았고, 신청자도 나 외에는 없던 터라 참으로 희한했다. 문득 내가 뽑히지 않은 이유가 나이 탓은 아닐까 생각됐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 뒤에 지원했던 사무실 앞을 지나다가 거기에 앉아 있는 젊은 친구를 보고 말았다.

이런 경험들은 나를 한없이 위축시켰다. 일하고 싶었지만 스스로 물러서는 경우가 잦아졌다. 어디를 가든 한 살이라도 적게 보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나이를 묻지 않으면 굳이 말하지 않았고 궁금해하면 괜히 말끝을 흐렸다. 숫자 하나가 이렇게도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들 줄이야. 지난 경력은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이는 어떤 방법으로도 설득시킬 수 없었다.

언젠가 만났던 인생 선배인 김 선생님도 비슷했다. 선생님은 올해 예순다섯이 되었다. 과거에 모 대기업 관리자로 잔뼈가 굵은 분이었다. 선생님은 본인이 일 잘하는 사람이었다며 줄곧 자랑을 해왔다. 그런 분이 그날은 왠지 침울해 보였다. “65세가 되니까, 더 쓸모가 없어지네요.” 선생님은 이렇게 한마디하고는 내내 속상해했다. 나이는 사람을 가려내는 잣대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러면서 꺼낸 지하철 얘기는 사뭇 엇갈렸다. “저 요즘 돈 안 내고 다니잖아요.” 그날도 약속 장소로 올 때 무료로 전철을 탔다고 하였다. 65세가 되니 그거는 좋다고도 덧붙였다. 우스갯소리였지만, 어딘가에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일터에서는 후순위가 되고 복지 제도에서는 우대를 받게 된 현실, 선생님 표정에는 기쁨과 우울함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당시는 그 복잡한 속내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마음이 조금씩 공감되었다. 연금 때문이다. 새해가 되면 나는 국민연금 수령 나이에 한층 가까워진다. 다달이 연금 받을 생각을 하면 전엔 나이 드는 게 싫었는데, 요즘엔 괜찮다 싶다. 월급 끊긴 시간을 근근이 보내고 있는 지금, 연금 개시일만 손꼽아 기다리는 내 모습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얼마나 남았을까, 모를 리 없는데도 계속해서 확인하는 나 자신이 측은했다.

안정적인 정기 수입인 국민연금은 퇴직자인 내게는 단순한 돈이 아니었다. 넉넉하진 않더라도, 앞으로의 시간을 홀로 버티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와 같았다. 견뎌온 세월에 대해 보상받는 느낌이랄까. 그것은 금전적 차원을 넘어, 나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인정해 주는 듯한 위로였다. 부담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찾아오는 감정은 퇴직 이후에 만나게 된 나이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나이를 불리한 조건으로만 여겨왔다. 구직할 때 내 발목을 옭아매는 덫이거나 선택의 폭을 좁히는 제약처럼 느꼈다. 하지만 찬찬히 돌아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직장인 시절에는 책임이 맡겨지는 신뢰의 바탕이었고, 내 의견에 힘이 실리는 근거가 되었다. 같은 숫자인데도 내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전혀 딴판으로 작동해 왔던 셈이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자 나이를 대하는 방식을 바꾸고 싶어졌다. 줄일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이라면 애써 외면하기보다 함께 가보려 한다. 젊어야만 가능한 것들을 아쉬워하지 않고 지금 나이여서 가능한 일들을 해 볼 생각이다. 빠르게 내달리던 청춘의 속도 대신, 오래도록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리듬으로 살아갈 참이다. 올해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나이가 가져올 세상을 기대해 본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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