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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의 아들, 환인의 손자, 환국 등등···우리 역사의 ‘큰 틀’은 어디에 [최수문 선임기자의 문화수도에서]

서울경제 최수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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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대통령의 ‘환빠’ 언급으로 고대사 논쟁 재현
각자의 주장만 있을 뿐 불통과 불신은 여전해
단군왕검 조선의 정체성부터 합의해야 할 듯
한의사·음식가무 등 李대통령 역사 발언 주목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로비에는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LED 미디어 타워에 광개토대왕릉비를 디지털로 재현한 것이다. 이 디지털 광개토대왕릉비는 새겨진 글자를 반복해 보여주고 있는데 비문의 첫 문장은 이렇다. “유석 시조추모왕지창기야, 출자북부여 천제지자 모하백여랑(惟昔 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해석하면 이렇다. “옛날 시조 추모왕(일반적으로 주몽왕)이 나라의 기틀을 여시니,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드님이시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천제(天帝)는 지금의 표현으로 하면 ‘하느님’이 되겠다. 광개토대왕릉비 자체는 만주에 있지만 복제본은 용산의 전쟁기념관이나 천안의 독립기념관 광장에도 있기 때문에 일반인에게 익숙하다. 필자는 이 비석을 볼 때마다 궁금한 점이 있었다. 이 비석이 세워진 서기 414년 고구려 시대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 임금의 조상 또는 시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쓴 문장을 어떻게 봤을까 하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는 곳은 지금은 한적한 곳이지만 고구려 시대에는 현재의 종묘 앞 광장처럼 붐비는 곳이었을 테다.

‘터무니 없는 소리’라고 치부하고 숨죽여 비웃었을까, 아니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손을 임금으로 모신 위대한 나라의 백성’이라고 자랑스러워했을까. 모를 일이다. 물론 하느님의 아들이라니, 터무니 없는 말이 맞다. 이 비석을 세운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이런 신화화도 필요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우리 고대사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여럿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왕검이다. 대략 “환인의 서자 환웅이 인간 세계에 내려와···웅녀와 혼인해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단군왕검이라고 했다. 나라를 세우고 이를 ‘조선’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환인(桓因)’은 앞서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말하는 ‘천제’와 비슷한 의미일 테다. 아마 ‘하늘’의 음을 빌려 한자로 적지 않았나 한다. 그러면 결국 ‘하느님’이다.

흥미로운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자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박물관이고 당연히 우리 고대사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하고 있어야겠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아쉬워하는 것은 필자 만일까.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는 ‘고조선실’이 있다. 입구에 ‘단군왕검과 고조선’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는 ‘단기’라는 독자 연호가 있습니다. 단기는 단군기년을 뜻하며 문헌기록에서 확인되는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운 기원전 2333년을 출발점으로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단군과 고조선은 한민족 역사의 뿌리와 같습니다”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이런 몇 문장에 대해서도 책 수십 권을 채울 논쟁이 일어날 수 있다. 물론 그런 것까지 논의하기는 어렵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하고자 한다. ‘단군왕검과 고조선’이라고 돼 있고 문장에서 건국 시기까지 나와 있지만 문제는 건국 지역이 없다. 전시장 어디를 둘러봐도 고조선이 어디에 있었냐는, 즉 중심지(이를테면 수도)의 위치에 대한 것은 없다. 만주와 한반도가 고조선 영역이라는 두리뭉실한 그림이 있을 뿐이다.

물론 학설이 여러가지고 정설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기는 하다. 중심지의 위치는 몽골에서 만주, 한반도 북부까지 다종다양하다. 그리고 이런 학설들이 전시장에 설명돼 있지는 않다. 때문에 관람객들은 고조선에 대해 아주 피상적인 인식에 머물게 된다. 우리가 ‘단군신화’라고 부르는 그런 식이다. 즉 역사가 아니라 신화다. 우리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수십년을 연구하고도 ‘한민족 역사의 뿌리’에 대해 공통된 이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고조선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것은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이 언급한 ‘환빠’ 때문이다. (필자는 명칭으로 ‘고조선’이 아니라 ‘고대 조선’이 맞지 않느냐는 주장을 제기한 바 있다.)

‘환빠’는 환단고기 추종자를 의미하는 데, 즉 환빠 논쟁은 말 그대로 환단고기 논쟁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2일 교육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게 “역사 교육 관련해서 무슨 ‘환빠’ 논쟁이 있지 않느냐”며 “단군, 환단고기를 주장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비하해서 환빠라고 부르지 않냐. 고대 역사 연구를 놓고 다툼이 벌어지는 것이지 않나”라고 질문했다. 이에 박 이사장이 “소위 재야사학자들이라고 그분들 얘기인 것 같은데 그분들 보다는 전문 연구자들의 이론이,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고 답했고, 또 이 대통령은 “증거가 없는 건 역사가 아니다? 환단고기도 문헌 아니냐”고 덧붙인 바 있다. 결론적으로 이 대통령은 “역사를 어떤 시각에서 어떤 입장에서 볼 거냐, 근본적인 입장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정리했다.

‘환빠’ 논쟁에서 필자의 관심을 더 끈 것은 이 대통령의 발언 이후 며칠 지난 17일 “‘사이비역사 일명 유사사학, 재야사학’에 대한 역사학계·고고학계의 입장”이라는 이름으로 “이재명 정부와 여·야 정치권은 ‘사이비역사’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취하라!”는 성명서가 발표된 것이다. 이 성명서에서는 역사학계 및 고고학계 48개 학회가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이비역사’는 환단고기를 말한다. 성명서는 “명백한 위서인 ‘환단고기’를 바탕으로 한 ‘사이비역사’는 부정선거론 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왜곡하는 ‘뉴라이트 역사학’과 일맥상통한다”고 주장했다.



환단고기는 이유립이란 사람이 1979년에 출간한 책이라고 한다. 다만 이유립은 이 책이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개별 책 4권을 독립운동가 계연수가 1911년 묶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밀스럽게 전해져 온 역사서라는 의미다. 단군왕검 이전 환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했고, 환국의 영토가 한반도를 넘어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등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에 걸쳐 있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앞서 역사학계 성명의 주장은 이것이 ‘위서’, 즉 거짓이라는 것이다. 고고학계와 역사학계가 이렇게 대규모로 성명서를 낸 것도 이례적이다.

하지만 이런 ‘사이비역사’라는 주장이 꼭 들어맞을지는 의문이다. 재야사학이 유사사학이고 사이비역사라는 주장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사학이라는 학문을 누군가 독점할 수 있다는 의미처럼 들려서 하는 말이다. 내가 하는 것은 진짜고 남이 하는 것은 가짜라는 말일까. 차라리 역사학계 및 고고학계 48곳이 힘을 합쳐 ‘한민족 역사의 뿌리’에 대해 결론을 내는 것이 먼저일지 않을까. 윤석열 전 정부 때 임명된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그동안 ‘뉴라이트’ 성향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역사학계 성명서에서 ‘환단고기’가 “뉴라이트 역사학과 일맥상통한다”고 하니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식이다.

정반대 의미로 광복회가 낸 성명도 주목할 만하다. 광복회는 ‘동북아역사재단 대통령 업무보고에 성명’이라는 이름으로 “고대사 연구에 대한 대통령의 문제 제기는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광복회는 이 성명서에서 “대통령이 ‘환빠’를 언급하며 우리 고대사 연구의 현주소를 질문한 데 대해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역사는 사료 중심’이라는 원론적 답변을 한데 유감을 표한다. 아울러 역사학계 등에서 대통령의 질문을 왜곡·과장해 ‘유사역사 옹호’로 몰아가는 태도 역시 본질을 외면하고 자기과시적 비판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대통령이 ‘환단고기’를 화두로 던진 것은 특정 문헌의 진위를 가리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고대사의 큰 틀조차 정립하지 못한 역사학계의 구조적 한계를 묻기 위한 문제제기라고 본다. 동북아역사재단과 이른바 자칭 주류라는 강단역사학계는 일본이 ‘일본서기’를 통해 자국의 고대사를 서사화하는 데는 침묵한다. 또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한민족의 역사를 ‘침탈’하는 동안 과연 제 역할을 해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재명 대통령의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좀 유별난 데가 있기는 하다. 그는 12일 보건복지부에 대한 업무보고에서 “난임 치료와 관련해 한방에 대한 국가지원은 있느냐”는 취지의 질문을 했다. 이날은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환빠’ 논쟁이 나온 날이다. 복지부 업무보고가 앞서 있었다.

정은경 복지부 장관이 “한의학이 객관적으로,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쉽지 않고(그래서 한방 지원은 없다)”라고 한데 대해 이 대통령은 “현재 복지부 공무원 중에 한의사는 몇 명이 있는지” 묻기도 했다. 양의사는 국과장 등 10여명인 반면 한의사는 1명뿐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나마 그 한의사는 사무관 직급이어서 당시 업무보고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덧붙여 며칠 후 정 장관의 발언에 대해서 한국한의사협회가 비판 성명을 내기도 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8월 20일 아리랑 국제방송의 특별 프로그램 ‘K-Pop: The Next Chapter’(케이팝: 더 넷스트 챕터)에 출연해 ‘문화강국 한국’의 역사적 연원을 설명하면서 “중국 고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한국 사람들은 가무에 능하다. 이미 고대 시대에도 특징이 잘 놀고 표현 잘하고 즐겁고 예술적인 문화적인 종족이었다는 거죠”라고 말한 바 있다. 방송에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매기 강 감독도 함께 했다.

당시 이 대통령이 언급한 중국 고전은 서기 3세기 후반에 씌어진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으로 여기에 “부여재장성지북 (중략) 이은정월제천 국중대회 연일음식가무 명왈영고(夫餘在長城之北 (중략) 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라는 내용이 있다. 관련 문장은 ‘국중대회 연일 음식가무’로 “축제 기간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춘다”라고 해석된다.

이 대통령은 사회자가 자신의 발언 중간에 끼어들어 “‘음주’가 빠졌네요”고 말하자 “그 책에는 그런 것은 안 나온다”고 정확히 지적하기도 했다. 정확한 단어는 ‘음식가무’로, 아쉽게도 나중에 ‘음주가무에 능하다’는 식으로 비하돼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최수문 선임기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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