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출발해 세종까지 약 240㎞ 남짓, 편도로는 짧지 않은 고속도로 구간이다. 이번 시승의 주인공인 혼다 파일럿 블랙 에디션은 겉으로는 과묵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꽤나 할 말이 많은 대형 SUV다.
파일럿은 숫자부터 대형이다. 전장 5090㎜, 전폭 1995㎜, 전고 1805㎜, 휠베이스 2890㎜의 차체는 글로벌 대형 SUV들과 나란히 세워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서울 도심 골목에서는 분명 ‘큰 차’로 느껴지지만, 블랙 컬러가 이 덩치를 적당히 다이어트해 준다. 과시보다 중후함에 가까운 인상이다. 크리스털 블랙 펄 바디와 블랙 전용 휠, 블랙 포인트가 더해진 외관은 ‘SUV가 이 정도 존재감은 있어야지’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보닛 아래에는 3,471㏄ V6 3.5L 직접분사 DOHC i-VTEC 엔진이 자리한다. 최고출력은 289마력, 최대토크는 36.2kg·m, 여기에 10단 자동변속기와 AWD가 조합된다. 수치만 보면 ‘힘 좀 쓰는 대형 SUV’ 정도지만, 실제 주행 감각은 숫자보다 더 여유롭다. 서울 요금소를 지나 가속 페달을 깊게 밟으면 파일럿은 허둥지둥 속도를 올리기보다 묵직하게 몸을 일으켜 세운 뒤 꾸준히 전진한다. 엔진음은 고회전에서도 과하게 튀지 않고 6기통 특유의 매끈한 회전질감이 실내로 은근하게 스민다.
서울–세종 구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속도로에서 이 차의 성격은 더욱 분명해진다. 시속 100~120㎞ 크루즈 구간에서 엔진 회전수는 낮게 유지되고, 풍절음과 노면 소음은 잘 눌려 있다. 복합연비는 8㎞/L대 초반, 실제 고속 위주 주행에서는 리터당 9~10㎞ 정도를 오가는 체감이다. 연비로 선택할 차는 아니지만, 차체 크기와 출력, AWD를 감안하면 납득이 가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연비 스트레스’보다 ‘주행 여유’가 더 크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추월 가속은 폭발적이진 않다. 대신 페달을 조금만 더 밟으면 속도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10단 자동변속기는 단수를 자잘하게 바꾸며 토크 밴드를 놓치지 않는다. 덕분에 세종 인근의 완만한 오르막과 곡선 구간에서도 엑셀 페달과 차의 반응 사이에 불필요한 공백이 없다. 운전자는 그저 시선을 멀리 두고 적은 조향과 페달 조작만 이어가면 된다.
대형 SUV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 중 하나인 차체 거동도 파일럿의 장기다. 긴 휠베이스와 넓은 트랙, 그리고 AWD 시스템의 조합은 직진 안정감을 높여준다. 차로를 바꾸거나 고속에서 살짝 꺾이는 코너를 지날 때에도 차체는 과하게 기울지 않고 한 템포 늦게 따라오는 흔들림도 거의 없다. 고속도로에서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패밀리 SUV에게 중요한 ‘안정감의 인상 점수’가 높은 이유다.
실내는 숫자로 설명하면 휠베이스 2890㎜가 전부지만 체감은 그 이상이다. 1열은 말할 것도 없고, 2열은 어지간한 중형 SUV의 1열 못지않은 여유를 보여준다. 3열 역시 아이 전용이 아닌 성인도 단거리 이동은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공간과 시트 각도를 제공한다. 블랙 인테리어는 화려함 대신 차분함을 택했다. 대시보드와 센터콘솔은 직관적인 버튼 배치로 꾸며져 처음 타도 금방 적응할 수 있다.
승차감은 북미 시장을 겨냥한 대형 SUV답게 장거리 지향적이다. 서스펜션은 말랑거린다기보다 탄탄하게 세팅되어 요철을 지날 때 차체가 한 번에 움직이고 빠르게 자세를 잡는다. 그렇다고 거칠게 튀는 느낌은 아니다. 서울에서 세종까지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허리와 어깨에 남는 피로감은 의외로 적었다. 특히 2열은 ‘VIP석’이라기보다 ‘가족 모두가 동등하게 편한 자리를 나눠 가진 느낌’에 가깝다.
안전·편의 사양도 대형 SUV의 체면을 지킨다. 혼다 센싱 기반의 각종 주행 보조 기능은 장거리에서 운전자의 부담을 덜어준다. 차선 유지 보조와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을 적절히 활용하면, 서울–세종 왕복 구간이 훨씬 짧게 느껴진다. 여기에 넉넉한 적재 공간까지 더해지니, 가족 여행이나 캠핑 장비를 가득 싣는 주말에는 ‘몸집 큰 차를 샀다’는 사실이 오히려 든든함으로 바뀐다.
가격은 트림에 따라 대략 6천만 원 후반~7천만 원 초반대, 블랙 에디션은 최상위에 위치한다. 결코 가벼운 가격은 아니지만, 파워트레인, 차체 크기, 편의·안전 사양을 한데 묶어 놓고 보면 계산법이 달라진다. 조용히 오래 같이 가 줄 대형 SUV를 찾는 이들에게는 설득력 있는 패키지다.
김재원 기자 jkim@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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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 기자 jkim@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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