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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소수 언어권’ 출판사가 사는 법…가치를 팔면 시장은 커진다 [.txt]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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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빠를 자국 브랜드 이케아와 에이치엔엠(H&M)보다 흔히 볼 수 있는 데가 스웨덴이다. 그 스웨덴에서도 “올해 본격적으로 저출산 문제가 (출판 시장에)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위기 의식에 따른 결론과 전망은 한국 출판인들의 것과 많이 다르다. 지난 5일 스톡홀름 중심가의 쿨투르후세트 내 0~9살 어린이 대상 도서관 ‘룸 푀르 바른’(맨 위)과 지난 13일 중부 유르고르덴 섬에 있는 어린이 박물관 ‘유니바켄’(나머지)에서 부모와 아이가 함께 책을 읽거나 놀고 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빠를 자국 브랜드 이케아와 에이치엔엠(H&M)보다 흔히 볼 수 있는 데가 스웨덴이다. 그 스웨덴에서도 “올해 본격적으로 저출산 문제가 (출판 시장에)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위기 의식에 따른 결론과 전망은 한국 출판인들의 것과 많이 다르다. 지난 5일 스톡홀름 중심가의 쿨투르후세트 내 0~9살 어린이 대상 도서관 ‘룸 푀르 바른’(맨 위)과 지난 13일 중부 유르고르덴 섬에 있는 어린이 박물관 ‘유니바켄’(나머지)에서 부모와 아이가 함께 책을 읽거나 놀고 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스톡홀름에서 100㎞ 떨어진 인근 도시 베스테로스 중심가 서점에서 지난 12일 시민들이 책을 골라보고 있다(위 왼쪽). 오후 5시께 이 도시 시청사에서 책을 읽는 아이들(위 오른쪽). 지난 9일 스톡홀름 중심가에 있는 쿨투르후세트 내 0~9살 어린이 대상 도서관 ‘룸 푀르 바른’ 앞에 모여 있는 아이들과 교사들(아래 왼쪽). 이 도서관 입구엔 한국어 포함, 54개 언어로 비치된 도서 관련 안내문(아래 오른쪽)이 붙어 있다. 2007년부터 여기서 일한 사서 안나 에클룬드는 지난 5일 오후 한겨레에 “근래 체코어 책을 분실해 1개국이 줄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임인택 기자

스톡홀름에서 100㎞ 떨어진 인근 도시 베스테로스 중심가 서점에서 지난 12일 시민들이 책을 골라보고 있다(위 왼쪽). 오후 5시께 이 도시 시청사에서 책을 읽는 아이들(위 오른쪽). 지난 9일 스톡홀름 중심가에 있는 쿨투르후세트 내 0~9살 어린이 대상 도서관 ‘룸 푀르 바른’ 앞에 모여 있는 아이들과 교사들(아래 왼쪽). 이 도서관 입구엔 한국어 포함, 54개 언어로 비치된 도서 관련 안내문(아래 오른쪽)이 붙어 있다. 2007년부터 여기서 일한 사서 안나 에클룬드는 지난 5일 오후 한겨레에 “근래 체코어 책을 분실해 1개국이 줄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임인택 기자






21세기의 첫 사반세기가 저문다. ‘살 활’의 활자(活字)는 기후위기 아래 생명체처럼 궁지에 몰려왔다. 이에 맞서 ‘기회의 활자’로 반전시키는 소규모 독립 출판사들도 있다. 한겨레가 이들을 찾아 영국, 일본, 미국, 독일을 톺은 데 이어 ‘소수 언어’라는 생래적 한계까지 지닌 스웨덴에서 그 장정을 마친다. 주제로는 ‘어린이의 책’이다. 한 독일인 전문가의 말마따나 “세계 아동 문학의 성배(Holy Grail)”로 스웨덴 아동 문학이 불리기까지 또 다른 파동을 일으키는 그곳 독립 출판인들을 만났다. 올해만큼 국내 어린이책 시장에서 곡소리가 쏟아진 적은 없다. ‘읽지 않은 아이는 읽지 않는 어른이 된다’고 비관할 수밖에 없을 때, ‘읽는 아이가 읽는 어른이 된다’고 기대하는 작은 언어권 작은 출판사들의 이야기가 국내 출판계와 새 정부 정책·행정가를 지나, 마침내 독자에 가닿길 바라본다.





지난 8일 오후 스웨덴 스톡홀름 쇠데르말름의 공원 비타 베르겐 둔덕길을 지나 키 낮은 가옥을 만났다. 오후 2시에 가까웠으나 사위는 차츰 어스름하여 불빛이 선명했다. 허름한 단층 건물에 입주한 회사의 정체도 드러난다. 1992년 설립된 독립 출판사 트라난과 2004년 자회사로 세워진 트라스텐이다. 트라난이 성인 문학, 트라스텐이 아동 문학을 담당한다. 그래 봐야 한 지붕 아래 전체 직원이 셋. 기자가 방문한 시각, 두칸짜리 사무실 한편에서 책 포장 업무가 한창이었다. 아동 문학 전담 편집자인 클라라 크론이 말했다.



“대부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문 들어온 책들이에요. 출판사 누리집을 통한 직접 구매 배송이 우리 수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다만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전세계 인구는 스웨덴 1050만명을 포함해 1100만명 정도. 한국 인구의 20%에 불과하다. 성탄절을 먼저 맞은 출판사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수 언어권 출판사인데 내수로 충분한가, 영어권 시장을 목표로 하는가?



“아뇨, 스웨덴이 목표입니다. 애초 우리는 국외 번역 도서만 출판하고요. 스웨덴어 사용자가 (접경 국가인) 핀란드 등지에서 주문해 오긴 합니다.”



―저출산, 디지털 과잉 등으로 여러 어린이책 출판사가 위기를 호소한다. 트라스텐은 어떤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스웨덴도 출산율과 독서율의 하락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출판 시장으로 보자면, 인쇄 비용이 올랐고요. 아동 도서는 컬러 때문에 제작 비용이 더 올라가는데도 가격이 저렴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서 소비자가를 인상하는 데 한계가 있죠. 또 유럽과 스웨덴 전역에서 아이들의 읽기 능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어지던 답변은 뜻밖으로 귀결한다. “하지만 우리 출판사로만 보자면, 큰 위기랄 게 없었어요.” 크론은 두번 말한다. 기자가 두번 물었기 때문이다.



국외 문학 전문 출판사 트라난·트라스텐의 직원들. 위 오른쪽이 아동 문학 담당 클라라 크론, 왼쪽 두번째가 성인 문학에 치중하는 대표 요한네스 홀름크비스트. 지난 8일 크론이 트라스텐에서 출간된 백희나 작가의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아래 왼쪽). 출판사 누리집을 통해 직구 주문이 올 경우 바로 배송할 수 있도록 대기 중인 책들(아래 오른쪽). 임인택 기자

국외 문학 전문 출판사 트라난·트라스텐의 직원들. 위 오른쪽이 아동 문학 담당 클라라 크론, 왼쪽 두번째가 성인 문학에 치중하는 대표 요한네스 홀름크비스트. 지난 8일 크론이 트라스텐에서 출간된 백희나 작가의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아래 왼쪽). 출판사 누리집을 통해 직구 주문이 올 경우 바로 배송할 수 있도록 대기 중인 책들(아래 오른쪽). 임인택 기자




지난 8일 방문한 국외 문학 전문 출판사 트라난·트라스텐의 내외 풍경. 트라스텐의 클라라 크론이 백희나 작가의 작품 ‘장수탕 선녀님’의 도판 앞에 서있다. 1700년대 지어진 건물로 재래식 목재 난로(아래 오른쪽)가 사무실 한쪽에 설치되어 있다. 임인택 기자

지난 8일 방문한 국외 문학 전문 출판사 트라난·트라스텐의 내외 풍경. 트라스텐의 클라라 크론이 백희나 작가의 작품 ‘장수탕 선녀님’의 도판 앞에 서있다. 1700년대 지어진 건물로 재래식 목재 난로(아래 오른쪽)가 사무실 한쪽에 설치되어 있다. 임인택 기자


이들은 오로지 국외 작품을 ‘발굴’해 ‘직역’으로만 소개하려는 번역 문학 전문 출판사다. “스웨덴 아이를 위한 세계 어린이책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으로 설립된 트라스텐은 초기 연간 1~2종을 펴내다 올해 6종으로까지 몸피를 키워왔다. 트라난은 한해 15~20종을 출간한다. 스웨덴어로 번역된 첫 한국 소설(2001)을 포함해, 성인·아동 전체 작품의 원적이 90개국 안팎에 걸친다. 회사는 볼보 본사가 있는 스웨덴의 제2 도시 예테보리에 지점도 세웠다. 2018년이었다. 트라스텐은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25개 나라의 아동 문학서를 옮겨 오며 성패를 거듭한 결과, “3~6살 대상의 그림책”으로 신간 목록을 좁혔다.



트라난은 1997년 중국 작가 모옌을 스웨덴에 처음 소개해 2012년 노벨 문학상 수상, 트라스텐은 ‘구름빵’의 백희나를 2019년 처음 소개해 이듬해 아동 문학계의 노벨 문학상으로 불리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알마상) 수상에 일조했다. 크론은 사세 확장의 또 다른 증거로 “2022년 채용된 저 자신”을 꼽으며 웃었다. 전까지 직원 둘이서 “꾸준한 성장”과 “성과”를 일궜다는 얘기다. 이제 인턴 1명이 더 늘었다. “아동·성인 아울러 번역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수익도 커진 덕분이다. 성인 번역 문학 판매량과 아동 번역서 판매량이 연결되어 있다.”





소수 언어권의 운명적 출판 위기





스웨덴의 국외 문학 수용성은 높다. 전체 도서의 20%가 스웨덴어로 번역되지 않은 영어 도서다. 바로 들여와 바로 읽는다. 스웨덴어 독서 시장은 더 작아진다. 한편으로 ‘상품’을 찾아 “출판사들이 비영어권 책들에 점점 더 관심을 갖”는 배경(스웨덴 독립 출판사 오팔의 설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스웨덴 출판 세계의 일면일 뿐이다. ‘스웨덴의 진실’은 소수 언어권 시장에 발을 딛고서도 세계 아동 문학을 선도한다는 점이겠다. 이러한 부정합적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가. 한겨레가 이달 초순 스톡홀름 일대에서 만난 출판인들에게 거듭 물은 배경이다. 내수가 부족하진 않으냐고. 해외 시장이 결국 성장 내지 생존 조건은 아니냐고. 독립 출판사만 놓고 봤을 때, 하물며 스웨덴 예술위원회의 알마상 책임자 오사 베리만도 한겨레 인터뷰에서 “활기찬 독립 출판의 생태계는 어느 나라에서든 이익”이라면서도 “스웨덴의 문제는 인구가 고작 1천만명에 불과하다는 점”이라질 않는가.



“아니요, 우린 스웨덴에서 출판합니다. 독립 출판사로서 신속하고, 작가·일러스트레이터와 매우 긴밀하게 협력하죠. 표준화된 공정이란 게 거의 없어요. 창의적 위험을 감수하는 데 능숙하고, 그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고 생각해요.”(릴라 피라트 출판사, 2011년 설립)



“회사 만들고 20년 여태 사업은 잘됐어요. 최근 몇년 책 판매량이 줄긴 합니다. 시장이 더 안 좋아지면 해외도 신경 써야겠지만, 지금까진 내수에 주력하고 사업도 지속 가능합니다.”(올리카 출판사)



크론의 말처럼 스웨덴도 전세계 주요 국가에 닥친 출판 산업의 위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되레 요인은 더해지고, 얽힌다. 스웨덴 예술위의 베리만에 이어, 스톡홀름 시립 도서관 현 관장으로 내년 국가기록원장에 임명된 다니엘 포르스만 또한 한겨레에 말한다. “스웨덴·노르딕(북유럽) 출판사의 경우 상대적으로 작은 언어 시장이 독특한 도전 과제를 안긴다.” “자연스레 성장 한계에 직면해 있”는 북유럽 언어로 “결실을 맺”고 “지속 성장해 왔다”는 저들의 활로가 한국어권 출판의 활로일 수는 없을까.





‘스웨덴도 낡았다’는 도전





스웨덴어 ‘올리카’는 ‘다르게’를 뜻한다. 출판사 올리카의 사명이자 태도이고, 전략이며 비전이다. 지난 5일 오후 스톡홀름 시내 복판에 위치한 공공 문화시설 쿨투르후세트(Kulturhuset·문화의 집)에서 한겨레와 만난 올리카 대표 마리 토미치치는 “스웨덴 아동 문학이 진보적이란 말을 자주 듣고 기자들도 묻던데, 내 생각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경영·조직관리 연구자였던 그가 2006년 출판사를 차린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싱글맘으로 키우던 5살 아들과 비슷한 처지를 동화책에서 찾기 어려웠고, 일터였던 학계에는 성평등 의식이 부족했다. “좌절감이 매우 컸다.” 그즈음 조사한 2002년 데이터가 말하길, 스웨덴 어린이책 주인공으로 여자아이는 30%에 불과했다. “양성평등이 덜 된데다 여자애가 주인공이면 남자애 경우보다 책이 잘 안 팔린다는 업계 관념도 있었”던 탓이다. “엄마나 아빠만 둘일 수도 있는데, 사회 변화를 위해 어린이책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창업된 올리카는 젠더 평등, 다양성의 주제에서 기존의 규범을 혁파하는 책으로, 스웨덴 안에서도 특히 진취적인 출판사로 평가받는다. 여주인공 동화(‘발명가 요한나’ 시리즈)를 첫 작품으로 출시(2007)하면서부터 주목받은 건 물론, ‘그’ ‘그녀’가 아닌 성 중립적 인칭 대명사(hen)로 기술된 동화책(‘키비와 괴물사슴’, 2012)을 자국 내 최초 출간해 전국적 논쟁을 촉발시켰다. ‘세번째 대명사’의 사용을 금지한 유치원이나 단체, 전문가 그룹이 맞서 찬반이 거셌으나, 미디어와 일상에서 사용 빈도가 무장 늘었다. “근현대 스웨덴어 400년 동안 대명사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현지 언론의 평가)였다. 2년간 논쟁 끝에 스웨덴 한림원은 사전에 ‘hen’을 등재하기로 한다. 스스로 “액티비스트”(운동가)라고도 말하는 토미치치에게 하나 마나 한 질문을 던졌다.



―성평등, 다양성이 아이들에게 왜 중요한가?



“아들 얘기를 다시 할 수밖에 없어요. 책에 자신의 현실이 존재하지 않을 때 아이는 아웃사이더라고 느끼고 제 가치를 절하시키죠. 성별, 머리색, 인종이 다양화한 책 세계에서 아이는 정체성과 자존감을 찾고, 사회에 포용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안정감, 소속감이죠.”



이는 우수한 국외 번역서의 필요를 강조하는 트라스텐 크론의 논리와도 닿는다. “정말 훌륭한 스웨덴 작품들이 많지만, 스웨덴 애들, 스웨덴 문화만 나와요. 모두가 다르다는 사실과 그 (다채로운) 세계를 상상력을 동원해가며 아이들이 발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후 ‘올리카적 가치’를 뒤따르는 자국의 출판사들이 “늘고 있다”고 토미치치는 말한다. “다양성을 다룬 책들이 훨씬 많아”졌으니, 올리카는 “사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도 부단히 창의적이고 혁신적이며, 사회 변화적 이슈를 포착해야 한다.” 새로운 가치가 새 경제재가 되어, 소수 언어권은 외연일 뿐 시장은 안으로 확장하는 격이다. 해외 또한 올리카가 우선하여 뒤쫓진 않았으나, 자연스레 올리카를 뒤따르고 있다. 약 60종의 어린이책으로 15개 언어권 독자와 만나고 있다.



2006년 설립된 어린이책 독립 출판사 올리카의 대표 마리 토미치치. 지난 5일 오후 스톡홀름 쿨투르후세트 5층 카페테리아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했다. 올리카는 책을 기반으로 한 온·오프라인 교육에도 주력한다. 임인택 기자

2006년 설립된 어린이책 독립 출판사 올리카의 대표 마리 토미치치. 지난 5일 오후 스톡홀름 쿨투르후세트 5층 카페테리아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했다. 올리카는 책을 기반으로 한 온·오프라인 교육에도 주력한다. 임인택 기자




한국 아이들에겐 위험한 바깥?





국내 유통 중인 어린이책 ‘스웨덴식 성평등 교육’(2019)은 올리카의 대표 베스트셀러다. 2009년 현지 출간된 ‘아이에게 100가지 가능성을 선물하세요’가 저본이다. “올리카의 추구 가치와 존재 이유를 요약한 책”이라는 자평대로, 만연해 있는 성 역할 고정 관념을 잘근잘근 부순다. ‘누나 옷을 물려줘도 괜찮을까’ ‘좋아해서 괴롭히는 거야’ ‘다리 사이에 뭐가 있니?’ ‘가장 빠른 정자가 아이가 되네’ 등이 소제목이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가 추진했던 ‘나다움 어린이책’ 권장 도서에 뽑혔다면, 아무렴 ‘조기 성애화’ 논란에 휘말리고 말았겠다. 1971년 덴마크에서 출간되어 정부로부터 아동도서상까지 받은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를 포함해 초등학교에 배포되었던 성·평등 교육 어린이책 7종이 보수 정치·종교 세력의 시비 끝에 회수되고, 사업이 통째 좌초한 지 5년을 맞았다.



요행히(?) 올리카의 책은 당시 나다움 어린이책 134종에 포함되지 않았다. 출판사 다봄 쪽은 “학부모, 교사를 위한 성인 교육서로 분류되어 그랬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직격탄은 스웨덴의 유명 작가 페르닐라 스탈펠트(63)가 맞았다. 출판사 시금치가 국내 번역 소개한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이다. 원제는 ‘책’ 시리즈 중 하나인 ‘사랑 책’(The Love Book, 2001)으로, 사랑에 관한 여러 지식과 철학적 사유, 사랑의 동태가 아기자기 익살스레 전개된다.



21개 언어로 16개 작품을 국외 소개하고 있는 스탈펠트 작가를 지난 8일 오전 대형 출판사 라벤&셰그렌에서 만났다. 역시 ‘사랑 책’이 문제였다. 작가는 “러시아에 출간되었다가 동성애 대목 등을 의회가 문제 삼고 출간을 금지했다”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러시아는 자유사상이 존중받지 못하는, 독재 국가죠.” 2005년께 일이다.



―이후 어떤 책이든 ‘금서’ 논란이 제기된 나라가 있는가?



“(구겨진 인상으로 고개를 흔들며) 없어요.”



한국 언론과 처음 만나, 처음 전해 들은 5년 전 국내 소식에 스탈펠트가 처음으로 응답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왜 침실 문을 잠그는지 알 권리가 있어요.” 작가가 책으로 아이들과 벌이는 ‘지적 유희’를 가늠케 하는 한마디로서, 이 한 조각의 위트는 30년 문학관과 60년 생애를 눌러 담은 것이기도 하다.



“몸은 시간과 환경 속에서 우리의 운반체 역할을 하며, 정보를 받아들이고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 몸을 이해하고 그 필요를 아는 것은 좋은 삶의 필수 조건이죠. 좋은 아동문화(barnkultur, *각주 1)란 아이들이 자신과 삶, 그리고 자신의 몸을 분명히 성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전 지식을 중시하는 가정에서 동물과 자연에 둘러싸여 자랐습니다. 어머니가 의사, 아버지가 인문학자였어요. 연극하고, 그림 그리고, 발가벗고 수영도 했죠. 나체는 금기나 성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었어요.”



작가는 국립 현대미술관(모던 뮤지엄)의 직원으로, 어린이·청소년 대상으로 미술 교육도 한다. “관련 그림을 볼 때마다 아이들은 물어요. 생명의 탄생, 정자가 어떻게 난자에 들어가는지….” 작가의 “어린이 시선”, 바로 창작이 시작되는 그곳에서, 작가는 확신하게 된다. “아이들이 지식에 대한 권리, 문화를 통해 실존적 질문에 관해 성찰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카락 책’(1996), ‘똥 책’(1997), ‘죽음 책’(1999) 등 책 시리즈로 작가를 34살에 데뷔시킨 곳이 독립 출판사 에릭손&린드그렌이다. 라벤&셰그렌의 편집자이기도 했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과 함께 일했고 후임으로 어린이책 책임 편집을 맡았던 마리안네 에릭손(1924~2020)이 퇴직 후 차린 회사(*각주 2)다. 스탈펠트와 인터뷰한 출판사 내 접견실 이름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방’이다. “작가일 뿐 아니라 출판인으로서 교훈적 시각 없이 어린이의 시각 자체를 중시하는 작가 세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오사 베리만)고 평가받는 린드그렌의 조각상 앞에서 스탈펠트는 “제 책이 특정인들에게 그렇게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게 놀랍다”고 말했다.



스웨덴의 유명 동화 작가 페르닐라 스탈펠트가 8일 오전 출판사 라벤&셰그렌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스웨덴의 유명 동화 작가 페르닐라 스탈펠트가 8일 오전 출판사 라벤&셰그렌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스웨덴 작가 페르닐라 스탈펠트(왼쪽)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조각상. 그와 인터뷰한 장소인 라벤&셰그렌(오른쪽 맨 위)은 스웨덴 아동 문학을 상징하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이 편집자로도 일했던 전통의 주류 출판사이며 스웨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노르스테츠 출판사(오른쪽 가운데)의 자회사다. 간판에 모회사의 설립연도(1823)와 오디오북 사업체인 자회사 스토리텔이 보인다(오른쪽 아래).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스웨덴 작가 페르닐라 스탈펠트(왼쪽)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조각상. 그와 인터뷰한 장소인 라벤&셰그렌(오른쪽 맨 위)은 스웨덴 아동 문학을 상징하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이 편집자로도 일했던 전통의 주류 출판사이며 스웨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노르스테츠 출판사(오른쪽 가운데)의 자회사다. 간판에 모회사의 설립연도(1823)와 오디오북 사업체인 자회사 스토리텔이 보인다(오른쪽 아래).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언어가 언어를 만날 때





릴라 피라트의 대표 에리크 티투손은 한겨레에 “세계 각지의 책을 읽음으로써 심상과 시야를 확장시킨다”며 아동 문학 교류의 효용을 설명한다. 스톡홀름 쿨투르후세트 4층엔 0~9살 어린이가 읽고 놀도록 설계된 도서관(‘룸 푀르 바른’)이 있다. 여기에만 한국을 포함해 54개국의 어린이책 1만5천권가량이 구비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스웨덴 작품의 한국어 번역본까지 ‘한국 코너’에 꽂혀 있다. 이민자를 독자로 포섭하고, 커뮤니티로 포용하며 소수 언어권 시장이 또 한번 확장되는 양상이라 하겠다. 독립 출판사는 이 생태계의 핵심적 공여자이며, 수혜자가 된다. 1973년 세워진 독립 출판사 오팔의 멜리나 노르드스트란드(판권 담당)의 말대로다. “대형 출판사들은 수익 중심이라 대중성이 낮거나 소수 독자층 대상인 책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반면 “소규모 출판사들은 철학에 부합하는 도서를 중시하며 경제적 마진(의 감소)도 감수한다.” 독서율 저하, 닫힌사회로의 퇴보에 맞서 “정부의 문학 출판 지원이 매우 중요하다”는 근거가 된다. 지난해 국민독서문화 증진 지원 사업(예산 60억원) 폐지 등으로 대표되는 윤석열 정부 때의 출판 정책, 2020년 ‘나다움’ 사태 따위를 여전히 감당 중인 한국 독립 출판사들의 형편과 비교된다.



릴라 피라트의 티투손 대표는 말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쓰인 글이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지요. 이는 우리가 서로 다르다기보다 인간으로서 더 유사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많은 정치인들이 우리가 서로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게 만들려는 것과 정반대죠.”



스탈펠트의 책 11종을 국내 출간한 시금치의 송영민 대표는 말한다. “당시 사태가 부끄러워서 (지구 건너편) 작가에게 한마디도 전하질 못했어요. 나다움 논란 이후 공동구매가 취소되고, 반품도 잇따라 사실상 판매도 거의 되지 않았습니다. 너무 힘들었어요.” 소수 언어권의 처지를 묻던 질문이 그러니 모두 되돌아온다. 무엇이 위기인가.





전통과 미래의 ‘빅뱅’





트라난·트라스텐이 2022년 새 둥지를 튼 쇠데르말름은 오래된 노동자 지역에서 21세기 스웨덴의 대표적 ‘힙스터’로 바뀐 지역이다. 그 가운데서도 1700년대 지어진 건축물에 입주한 그 출판사의 별칭이 ‘세계 문학과 통하는 스웨덴의 관문’이다. 이 회사는 누리집 구매자에게 22개 카테고리로 책 선물을 권한다. 엄마, 아빠, 기분 나쁜 독자, 문학 연구자, ‘아시아의 진주’를 찾는 자, 얇은 책이나 벽돌책을 찾는 자, 엘지비티큐아이에이(LGBTQIA+) 등등을 위한. 신간 구독권도 취급한다. 낱권보다 저렴하게 내년치 예정된 신간 4권 또는 6권을 정기 배송한다.



가장 번잡한 도심의 드로트닝가탄 거리(여왕 거리)를 지나 의회, 왕궁, 한림원 등이 있는 감라스탄(구시가지)으로 가자면 강 저 앞으로 도도한 건물이 하나 보인다. 물 위로 남빛 네온사인을 드리운,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출판사 노르스테츠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책을 모두 펴낸 데다. 홍보용 흔한 플래카드가 하나 없다. 따질 일이 못 된다. 이 출판사와 결부한 노벨 문학상 작가만 30명 정도 된다고 한다. 노르스테츠의 또 다른 주력 사업이 오디오북(자회사 스토리텔)이다. 북유럽 최대 미디어·출판 회사 보니에르(보니르)의 북비트와 함께 북유럽 오디오북 시장을 좌우한다. 스토리텔 쪽은 한겨레에 “여기 독서 문화와 독서 인구는 한국과 다르고 ‘듣는 책’이 엔터테인먼트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며 “스토리텔 멤버십을 가진 가정이 넷플릭스만큼 흔하다. 어린이책은 아이들이 중독되어 문제일 정도”라고 말한다. 음악·미디어 서비스로 이름난 스웨덴의 글로벌 기업 스포티파이가 올해 북유럽 오디오북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스탈펠트 작가도 “오디오북으로 그림책을 읽어주긴 어렵고 기억에도 잘 남지 않는다”면서도 자신의 책을 영상과 오디오로 전환하는 데 적극적이다. 시대 감수성에 맞춘 개작에도 전혀 인색함이 없다.



전통과 미래의 ‘빅뱅’이 저 작은 언어권에서 저토록 다채롭게 벌어지고 있다.







각주 1: ‘어린이 문화’를 뜻하는 한 단어. 본연의 의미 외 북유럽에선 18살 미만 대상의 예술·문화 정책을 지칭하는 핵심 용어이자 고유의 학문 분야 이름으로 굳어졌다.



각주 2: 라벤&셰그렌이 2008년 에릭손&린드그렌을 인수하여 스탈펠트 작가의 작품도 관리하고 있다.





스톡홀름·베스테로스(스웨덴)/글·사진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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