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
전혜은·제이 옮김 '가장 느린 정의'
한국어 화자들에게 아직 낯선 용어와 개념에 알맞은 번역어를 붙여주는 일은 번역의 기본인 동시에 가장 급진적인 기여가 가능한 지점이다. 기본인 까닭은 모든 번역가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급진적인 까닭은 바로 이 지점에서 번역가가 눈에 띄게 개입하여 자신의 지문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번역어가 받아들여지고 그로써 보다 정돈된 언어로 논의가 전개될 때, 그는 원저자 못지않은 존재감으로 한국어 담론에 영향을 미친다.
'가장 느린 정의'는 번역가의 그런 긍정적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책이다. 책의 주제인 장애정의는 장애인권운동이 백인, 남성, 이성애 위주로 전개되지 않도록 아프고 장애가 있는 이들 중에서도 유색인, 퀴어, 트랜스, 기타 소외된 이들을 중심에 놓는 인식틀 겸 운동이다. 풀뿌리운동의 언어는 아직 우리말로 바꿀 것도, 정의와 맥락을 설명해줘야 할 것도 많다. 전혜은과 제이는 집요한 고민으로 그 일을 수행했고, 풍성한 역주로 개입의 의도와 근거를 밝혔다.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 분야에서 꾸준히 번역해온 두 공역자의 작업은 더 많은 사람이 논의에 접근할 수 있도록 풀숲에 오솔길을 내는 사랑의 행위다. 이런 의미를 기려 수상작으로 선정하자는 데에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모였다.
번역의 성취를 평가하는 기준은 물론 하나가 아니다. 후보작 10권은 제각각 다른 기준에서 빼어난 번역이어서 검토하느라 읽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소련 붕괴의 순간'의 최파일, '혁명의 봄'의 이재만은 디테일의 정교함이 살인적인 역사책을 늘 편안하게 옮긴다. '호라이즌'의 정지인, '인간 제국 쇠망사'의 조은영의 번역은 늘 정확하고 아름답다. 박소현의 '대항해시대의 동남아시아'는 이 분야에서 귀한 전문성을 가진 역자의 역량이 한껏 발휘되었다. '미국의 설계자 제임스 매디슨'은 오현아의 번역 덕분에 달음박질하듯 읽힌다. '자유'를 옮긴 박종대의 독일어 번역,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를 옮긴 지비원의 일본어 번역은 책을 더 돋보이게 한다. '당신은 하마스를 모른다'는 이준태의 번역과 팔레스타인평화연대의 감수가 책의 의의를 잘 뒷받침했다. 모두에게 감사와 경의를 전한다.
김명남 번역가
전혜은·제이 옮김 '가장 느린 정의'
가장 느린 정의·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 지음·전혜은 제이 옮김·오월의봄 발행·512쪽·2만8,000원 |
한국어 화자들에게 아직 낯선 용어와 개념에 알맞은 번역어를 붙여주는 일은 번역의 기본인 동시에 가장 급진적인 기여가 가능한 지점이다. 기본인 까닭은 모든 번역가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급진적인 까닭은 바로 이 지점에서 번역가가 눈에 띄게 개입하여 자신의 지문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번역어가 받아들여지고 그로써 보다 정돈된 언어로 논의가 전개될 때, 그는 원저자 못지않은 존재감으로 한국어 담론에 영향을 미친다.
'가장 느린 정의'는 번역가의 그런 긍정적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책이다. 책의 주제인 장애정의는 장애인권운동이 백인, 남성, 이성애 위주로 전개되지 않도록 아프고 장애가 있는 이들 중에서도 유색인, 퀴어, 트랜스, 기타 소외된 이들을 중심에 놓는 인식틀 겸 운동이다. 풀뿌리운동의 언어는 아직 우리말로 바꿀 것도, 정의와 맥락을 설명해줘야 할 것도 많다. 전혜은과 제이는 집요한 고민으로 그 일을 수행했고, 풍성한 역주로 개입의 의도와 근거를 밝혔다.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 분야에서 꾸준히 번역해온 두 공역자의 작업은 더 많은 사람이 논의에 접근할 수 있도록 풀숲에 오솔길을 내는 사랑의 행위다. 이런 의미를 기려 수상작으로 선정하자는 데에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모였다.
번역의 성취를 평가하는 기준은 물론 하나가 아니다. 후보작 10권은 제각각 다른 기준에서 빼어난 번역이어서 검토하느라 읽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소련 붕괴의 순간'의 최파일, '혁명의 봄'의 이재만은 디테일의 정교함이 살인적인 역사책을 늘 편안하게 옮긴다. '호라이즌'의 정지인, '인간 제국 쇠망사'의 조은영의 번역은 늘 정확하고 아름답다. 박소현의 '대항해시대의 동남아시아'는 이 분야에서 귀한 전문성을 가진 역자의 역량이 한껏 발휘되었다. '미국의 설계자 제임스 매디슨'은 오현아의 번역 덕분에 달음박질하듯 읽힌다. '자유'를 옮긴 박종대의 독일어 번역,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를 옮긴 지비원의 일본어 번역은 책을 더 돋보이게 한다. '당신은 하마스를 모른다'는 이준태의 번역과 팔레스타인평화연대의 감수가 책의 의의를 잘 뒷받침했다. 모두에게 감사와 경의를 전한다.
김명남 번역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