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웅진 서울 성모병원 비뇨의학과 교수는 “남성 갱년기는 여성에 비해 증세가 뚜렷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며 “남성 갱년기를 ‘질병’으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서울 성모병원 제공 |
쉽게 피곤을 느낀다. 자다가 화장실에 자주 간다. 성욕이 사라졌다. 많이 먹지 않아도 아랫배가 나온다. 근육이 줄어 몸 실루엣이 무너졌다. ‘텐션’이 떨어졌다. 집중력과 업무 수행 능력이 예전만 못하다. 짜증과 눈물이 늘었다.
49세 김홍기 씨가 최근 겪은 변화들이다. 친목 모임에서 증세를 토로했더니 비슷한 고민이 쏟아졌다. 노화, 우울증, 갑상선기능저하증 등 다양한 ‘카더라 진단’이 이어졌다. 친구 하나는 남성 갱년기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병원을 찾았더니 친구 말이 맞았다. 피검사 결과 남성 호르몬 수치가 1.9ng/mL로 정상 범주보다 낮았다. 겪고 있는 여러 불편함도 갱년기 증세와 일치했다. 아내의 갱년기만 걱정하던 김 씨로선 진단이 낯설게 느껴졌다.
여성은 중년에 접어들면 ‘갱년기 고비’에 대비한다. 대부분 원인, 증세, 치료법을 잘 알고 있다. 경험담을 나누는 문화도 자연스럽다. 남성은 다르다. 갱년기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부족하다. 병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알아도 얼렁뚱땅 넘기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 지식을 토대로 영양제를 먹는 등 ‘셀프 치료’를 하는 식이다. 중년 남성의 갱년기를 농담 소재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남성 갱년기는 실체가 있는 병이다. 테스토스테론 감소에 따른 다양한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아우른다. 배웅진 서울 성모병원 비뇨의학과 교수는 “남성 갱년기는 여성에 비해 증세가 뚜렷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며 “남성 갱년기를 ‘질병’으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 남성 호르몬, 30대부터 서서히 감소
남성 호르몬은 신체 전반에 관여한다. 가장 큰 역할은 성 기능 유지다. 성욕, 발기 기능, 정자 생성이 잘 유지되도록 돕는다. 몸의 근육과 뼈를 유지하고 지방을 분해하는 역할도 한다. 뇌에 작용해 인지와 정서적인 부분에도 영향을 준다.
이 호르몬은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줄어든다. 30대부터 매년 약 1%씩 줄어들다가 50대 이후 절반으로 떨어진다. 호르몬의 도움이 사라지면 전신 건강에 빨간불이 켜진다. 환자 대부분은 40∼60대다. 배 교수는 “남성 갱년기는 여성에 비해 강도는 약하지만 오랜 기간 지속된다. 인생 전반에 걸쳐 관리가 필요하다”라고 했다.
눈에 띄는 증세는 보통 성 생활과 관련해 나타난다. 성욕이 감퇴하고 발기가 잘 안 된다. 테스토스테론이 혈관을 확장해야 음경 내로 혈액이 잘 유입돼 발기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체력과 인지 기능도 떨어진다. 불안, 초조함, 무기력, 우울함도 쉽게 느낀다.
기초대사량이 줄면서 쉽게 살이 찐다. 열심히 운동해도 체중을 줄이기 힘들다. 지방분해 능력이 떨어지면서 고혈압, 당뇨 등 대사증후군 위험도 높아진다. 겉모습 변화를 겪기도 한다. 뱃살이 나오고 피부가 푸석해지며 체모가 줄어든다.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거나 땀이 많아지는 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다.
남성 갱년기도 조기 발견이 중요하다. 대사증후군과 서로 영향을 주고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배 교수는 “갱년기를 방치하면 호르몬의 영향으로 기존 질환이 악화할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며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호르몬 검사를 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했다.
● 호르몬 수치와 증세 종합해 진단
혈중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3.5ng/ml 이하에 관련 증세를 동반하면 남성 갱년기로 진단한다. 호르몬 수치는 하루 중에도 변해 농도가 가장 높은 오전 7∼11시에 검사한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 성 기능 관련 질문엔 솔직하게 답해야 한다.
호르몬 수치가 낮아도 증세가 없으면 갱년기로 보지 않는다. 증세가 있지만 호르몬 수치가 정상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갱년기가 아니다. ‘눈물이 많아졌으니 갱년기려니’, ‘상남자 성향이 강하니 갱년기가 아니겠거니’가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배 교수는 “호르몬 수치가 정상인데도 노화, 스트레스, 대사증후군 등으로 갱년기와 비슷한 증세를 겪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정신건강의학과나 내분비내과와 협진이 빈번하다”라고 했다.
치료는 호르몬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진행한다. 바르는 연고, 비강흡입제, 주사제 등으로 형태가 다양하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주사다. 연고는 매일 발라야 하지만 주사는 3개월에 한번만 맞으면 돼 비교적 간편하다. 바르는 약은 여성이나 어린이 등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남성 호르몬에 노출되면 불임과 성조숙증 같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임신 계획이 있다면 호르몬 보충 치료를 받지 않는 게 좋다. 호르몬 보충은 고환의 정자 생성을 억제할 수 있다. 적혈구가 증가해 혈액이 끈적해지는 적혈구 증가증위험도 높아진다. 전립선암 진단을 받은 환자도 주의해야 한다. 배 교수는 “호르몬 보충이 전립선 질환의 발생 원인이라는 근거는 없지만, 기존 질환이 있는 경우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호르몬을 보충한 뒤에는 약 3개월마다 피검사를 하면서 수치를 관찰한다. 정상 수치가 일정기간 잘 지속되면 검사 기간을 조금씩 늘린다. 수치 변화가 없으면 1, 2달로 간격을 좁힌다. 배 교수는 “남성 갱년기는 완치 개념이 따로 없는 평생 관리해야 하는 질환”이라며 “호르몬 추이를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생활 습관을 교정해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 비만은 호르몬 감소 주 원인
호르몬 감소는 불가피하지만 모두가 갱년기를 겪는 건 아니다. 남성 10명 중 2,3명 정도가 갱년기를 경험한다. 관건은 호르몬 감소 속도다. 서서히 줄어들면 몸이 적응해 증세가 뚜렷하지 않다. 약한 갱년기 증세는 모르고 지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호르몬이 뚝 떨어지면 여러 이상이 나타날 수 있다.
호르몬을 줄이는 위험 인자를 피하는 게 중요하다. 비만은 남성 호르몬 감소의 주요 원인이다. 지방 조직이 늘면 아로마타제라는 효소의 작용이 활발해져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으로 바뀐다. 이 과정에서 근육은 줄고 지방은 더 쉽게 쌓인다. 지방 조직은 또 염증을 유발하는 물질을 분비해 남성 호르몬 분비를 억제한다. 그 결과 근육량은 감소하고 지방은 더 늘어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잠은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일어나야 한다. 남성 호르몬은 하루의 흐름을 탄다. 늦은 오후에 가장 낮고, 이른 오전에 가장 높다. 호르몬 분비가 활발할 때 충분히 잠을 자고 적을 때 활동해야 호르몬 수치가 잘 유지된다. 실제 한 연구에 따르면 1주일 동안 수면 시간을 하루 5시간으로 제한했더니, 매년 1∼2%씩 감소하던 남성 호르몬 수치가 최대 15%까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올바른 생활 습관도 중요하다.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과도한 음주와 흡연은 피해야 한다. 특히 근력 운동은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촉진한다. 유산소 운동 또한 혈액순환을 개선해 전반적인 호르몬 균형을 돕는다. 하체는 시원하게 유지하는 게 좋다. 사우나 같은 높은 온도의 환경에 고환이 노출되면 호르몬 기능이 저하된다.
남성 갱년기는 방치해선 안 된다. 남성 호르몬이 지속적으로 줄어들면 전립선비대증, 발기부전 등 중장년 남성 질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대사질환, 심혈관계 질환, 뇌혈관 질환에 걸릴 위험도 높아진다. 배 교수는 “남성 갱년기는 노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변화”라며 “적극적으로 대응하면 건강한 노년을 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