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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는 저를 저주했습니다” 가정폭력 피해 아이였는데…180도 삶 달라진 이유가[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칼 라르손 편]

헤럴드경제 이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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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칼 라르손
& 카린 베르거(라르손)

가정폭력 피해자였던 화가
사랑으로 극복하려한 악몽
칼 라르손, 브리타(칼 라르손의 딸·일부 확대), 고양이 한 마리와 샌드위치, 1898, 종이에 수채 등, 47.5x68.5cm

칼 라르손, 브리타(칼 라르손의 딸·일부 확대), 고양이 한 마리와 샌드위치, 1898, 종이에 수채 등, 47.5x68.5cm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상상하지 못한 행복
칼 라르손, 게임 준비, 1901, 캔버스에 유채, 68x92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칼 라르손, 게임 준비, 1901, 캔버스에 유채, 68x92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여보, 집 밖에서는 또 눈이 와요.”
“아빠, 세상이 온통 하얘졌어요.”

“그렇군. 밖은 그야말로 험악한가 보군.”
“여보, 이런 날 ‘비라’(Vira·스웨덴식 카드놀이)를 하는 건 어때요? 술과 따뜻한 차, 신선한 과일도 있어요.”
“좋지. 바람이 몰아치고, 눈가를 찌르는 바늘 같은 눈이 오는 지금. 다 함께 카드놀이를 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야.”칼 라르손의 책 『Larssons』속 문장을 대화식으로 재구성 화가 칼 라르손이 이 말과 함께 거실의 흔들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부엌으로 몸을 옮겼다. 아내 카린이 벽 선반에서 리큐어(liqueur)를 꺼내고 있었다. 테이블 위 앉은 아이들은 벌써 과일과 쿠키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창문에선 눈이 사선으로 몰아쳤다. 집 모퉁이를 휘감은 바람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북유럽의 겨울밤은 늘 매섭다. 하지만, 이 냉혹함이 있어 집안 온기도 더 깊게 느낄 수 있는 법이다. 따뜻한 공기, 눈발을 막는 나무 벽, 부드러운 옷감과 담요는 존재만으로도 은근한 쾌감을 준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찬 기운은 외려 중독성 있는 포근함을 일깨운다. 이는 어릴 적, 잠귀신을 피해 이불을 푹 덮고 안도하던 그 기분과도 비슷할 것이다.

칼 라르손, 게임 준비(일부 확대), 1901, 캔버스에 유채, 68x92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칼 라르손, 게임 준비(일부 확대), 1901, 캔버스에 유채, 68x92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지금의 시간, 지금의 공간.

사랑하는 가족, 달콤한 음식과 아름다운 가구. 칼에게선 당장 보이는 모든 게 눈부시고, 눈물겨운 것이었다. 칼이 그린 <게임 준비>. 이것은 눈발 속 안락한 집, 아내와 카드놀이를 하고, 아이들의 종알대는 소리가 들리는 세계로 풍덩 빠져들기 직전의 풍경이다. 그림은 더없이 따뜻하고, 한없이 다정하다. 당시 칼의 나이는 마흔여덟 살. 칼은 때때로 자기 볼을 꼬집고, 아내와 아이들의 손을 쥐며 온기를 느끼려 했을 것이다. 지금의 행복이 믿기지 않기에. 사실, 그는 본인이 이런 장면 속 주연이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가정폭력의 피해자
칼 라르손, 빛과 그림자, 1877, 캔버스에 유채, 130x102.5cm

칼 라르손, 빛과 그림자, 1877, 캔버스에 유채, 130x102.5cm



칼의 어린 시절은 이런 장면과는 거리가 멀었다.

칼은 가정폭력이 있는 집안에서 자랐다. 뺨을 맞고 쫓겨난 적도 있으며, “네가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는, 이런 악랄한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 모든 일의 가해자는 아버지였다. 칼은 1853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변두리 마을에서 출생했다. 집안은 넉넉지 않았다. 아버지는 단순 노동자였다. 어머니는 세탁부였다. 아버지는 종종 술을 마셨다. 그럴 때면 집안도 분명 시끄러워졌다. 그가 취한 얼굴로 고함을 지르고, 손에 잡히는 물건을 집어 던졌기 때문이었다. 칼이 그나마 버틴 건 어머니 덕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옷을 빨아 버는 돈으로는 무엇도 붙들 수 없었다. “(그곳은)가난, 악덕, 더러움이 넘실댔고, 몸과 영혼은 서서히 끓어오르고 썩어가는 듯했다.” 훗날 칼은 과거 집 분위기를 이렇게 돌아본다.

그는 그 무렵부터 가슴으로 그렸을 것이다. 생일이면 함께 축하 노래를 부르는, 매년 크리스마스이브가 돌아오면 설렘에 잠들 수 없는, 그런 무해한 행복의 순간을 말이다.

칼 라르손, 빨간 모자와 숲 속의 늑대, 1881, 37x45cm, 개인소장

칼 라르손, 빨간 모자와 숲 속의 늑대, 1881, 37x45cm, 개인소장



칼에게도 재능은 있었다. 미술이었다. 이를 알아본 건 학교 교사였다.

교사가 어머니와 아이를 설득했다. 스웨덴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 지원서를 내보자고. 그게 덜컥 붙었다. 1866년, 이때 그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칼은 그때부터도 공부와 소일거리를 함께 했다. 학교에선 조용히 그림을 그렸고, 밖에선 신문사와 출판사를 찾아 삽화를 그렸다.

처음 몇 년간 칼은 혼란스러워했다. 잘 사는 선후배들, 잘 웃고 말 많은 동급생들 사이에서 열등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이들 틈에서 실력만은 착실히 다졌다. 그 결과 친구들을 제치고 우수상 격의 메달도 받을 수 있었다. 삽화 기술을 인정받아 아르바이트 수준 이상의 돈도 벌 수 있었다.

실패에 우울증을 겪다
칼 라르손, 영원한 안식, 1878, 캔버스에 유채, 24x34cm, 개인소장. 그림 속 여인은 칼 라르손의 친구이자 첫사랑, 빌헬미나 홀름그렌이었다는 말이 있다.

칼 라르손, 영원한 안식, 1878, 캔버스에 유채, 24x34cm, 개인소장. 그림 속 여인은 칼 라르손의 친구이자 첫사랑, 빌헬미나 홀름그렌이었다는 말이 있다.



칼은 1877년에 프랑스 파리에 왔다.

칼에게 파리는 도전의 땅이었다. 재주 있는 모든 예술가의 집결지와 같은 이곳. 여기서 인정받으면 그의 삶도 재차 도약할 수 있을 듯했다. 칼은 신인 화가의 등용문, 파리 살롱전에 대고 거듭 노크했다. 그런데, 문은 좀처럼 열리질 않았다. 겨우 열린 틈 사이로 내려오는 건 낙선 통보뿐이었다. 때마침 인상주의 등 ‘아방가르드’한 화풍이 고개를 든 시기였다. 칼의 그림은 분명 매혹적이었지만, 어떤 점에선 뻔한 면이 있었다. 그가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 데는 이러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그래. 내 인생이 그렇지. 그가 우울증을 겪은 건 이런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그것은 삶의 포기를 고민하게 할 만큼 뼈아픈 통증을 줬다. 칼은 그레쉬르루앵으로 몸을 옮겼다. 그곳은 파리 외곽에 있는 시골 마을이었다. 파리의 혼돈에 질린 사람들, 그중 특히나 스칸디나비아 출신 예술가가 모여 사는 땅으로도 알려진 지역이었다. 원래 칼은 이 일대에서 잠시 숲과 나무를 그릴 생각이었다. 밤이 되면 동향 동료들과 잔이나 기울일 마음이었다. 그렇게 어깨에 쌓인 침울함을 걷어낼 요량이었다. 칼은 몰랐다. 여기서 생이 180도 바뀌는 기회를 맞을 줄은.

운명처럼 마주한 사랑
칼 라르손, 작업실의 한적한 풍경, 화가의 아내와 딸 수잔, 885, 파스텔, 66x50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칼 라르손, 작업실의 한적한 풍경, 화가의 아내와 딸 수잔, 885, 파스텔, 66x50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카린 베르거.

때마침 카린이 그레쉬르루앵에 있었다. 그녀 또한 감각 있는 예술가였다. 아기자기한 색채를 창조하는 화가이자, 고급스러운 패턴을 포착할 수 있는 디자이너였다. 짙은 눈썹과 눈매, 장난스러운 미소와 얇은 발목을 가진 그녀는 개성 있는 모델의 자질도 갖추고 있었다. 칼은 그런 카린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었다. 칼과 카린은 종종 해와 달 아래서 같이 앉았다. 때로는 그저 대화를 주고받았고, 또 몇 번은 나란히 빈 화폭을 칠했다. 둘의 나이 차는 여섯 살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칼처럼 카린 또한 스웨덴 출신이었다. 칼의 후배 격으로 스웨덴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 다닌 적도 있었다. 아울러 둘 다 그림만큼 목공(木工)과 직조(織造)에도 관심이 있었다.

다만, 차이점도 적지는 않았다. 가장 다른 건 가정 환경이었다. 카린의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단호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딸을 믿고 지지하는 성향이었다. 두 사람은 취향에도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따지자면 칼보다는 카린이 더 모던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편이었다.

칼 라르손, 자화상, 1906, 캔버스에 유채, 95.5x61.5cm, 우피치 미술관

칼 라르손, 자화상, 1906, 캔버스에 유채, 95.5x61.5cm, 우피치 미술관



하지만 사랑이란 게 무엇인가.

그것은 나와의 공통점은 운명으로 두고, 차이점은 남다른 매력으로 여기는 게 아닌가. 칼은 카린에게서 안정감을 봤다. 이 관계를 남자와 여자, 화가와 뮤즈가 아닌 예술가 대 예술가로 대하는 면에서 단단한 자존감도 느꼈다. “…그 선은 고치지 말고 그대로 두는 게 좋겠어요.” 때때로 칼의 그림에 대고 거침없이 조언하는 모습에서 뚜렷한 주관도 엿볼 수 있었다.

이는 모두, 칼에게는 없거나 부족한 성향이었다. 그것은 분명 매력이었다. 존경스럽기도 한 부분이었다.

있는 힘껏 행복해지기로
칼 라르손, 해변의 카린, 1908, 종이에 수채, 5.43x7.5cm, 말뫼 미술관

칼 라르손, 해변의 카린, 1908, 종이에 수채, 5.43x7.5cm, 말뫼 미술관



칼은 카린의 부모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와 평생을 함께해도 되겠느냐고. 이들의 답은… ‘그래도 좋다’. 카린의 부모는 칼을 만난 적도 없었다. 이는 딸을 믿기에 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사실 카린 또한 칼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약간은 꽁한 면이 있지만, 그는 대체로 다정했다. 어릴 적 학대의 악몽과 꾸준히 싸웠고, 크고 작은 실패를 딛고도 어떻게든 온전히 ‘살아는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해보였다.

카린은 그런 칼을 단지 구하기 위해 발 맞추지 않았다. 그런 칼이라면 함께 삶을 꾸려가도 좋을 게 확실해 함께 걷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동정이 아닌 확신의 마음이었다. 칼은 이러한 카린을 보며 생각했을 것이다. 어릴 적 그린 꿈, 생일과 크리스마스이브의 무해한 행복을 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라고. 부, 명성, 인정. 칼은 잠시나마 강렬하게 품은 삶의 목표를 무너뜨린다. 어릴 적 보듬었던 옛 목표를 다시 올려세운다. 그것은 가정의 화목, 행복, 그리고 평화.

칼 라르손, 커다란 자작나무 아래에서의 아침 식사, 1896, 수채화, 32x43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칼 라르손, 커다란 자작나무 아래에서의 아침 식사, 1896, 수채화, 32x43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칼과 카린은 1883년 6월에 결혼했다.

당시 칼은 서른 살, 카린은 스물네 살이었다. 이들은 스톡홀름, 다시 그레쉬르루앵, 재차 파리로 바쁘게 몸을 옮겼다. 어디든 안정적으로 뿌리를 뻗고 싶었지만, 그게 역시나 쉽지는 않았다. 그러다 정착한 곳은 스웨덴 달라르나주의 마을 순드보른(Sundborn). 때마침 카린의 아버지가 그 땅에 있는 전통 목조주택을 물려준 덕이었다.

부부는 이 집의 이름을 릴라 휘트네스(Lilla Hyttnas·작은 제련소 집)로 지었다. 그렇게 뿌리는 내렸다. 다음에 할 일은? 그 위로 화목을 가꿔 행복을 꽃피우는 것이었다.

화목을, 행복을 그리다
칼 라르손, 게으른 구석, 1894, 종이에 수채, 32x43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칼 라르손, 게으른 구석, 1894, 종이에 수채, 32x43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은은한 파스텔 색감의 벽, 부드러운 줄무늬를 덮어쓴 가구, 눈을 즐겁게 하는 창틀 위 식물.

비스듬히 선 파이프 담배와 벗어놓은 신발, 쌓이고 펼쳐진 책더미에선 직전까지 여유를 즐긴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복슬복슬한 갈색 털 강아지는 햇빛 아래 몸을 눕히곤 단잠에 빠진 모습이다. 고민 없는 순간, 걱정 없는 시절이다. 그림 제목은 <게으른 구석>.

칼 라르손, 부엌, 20세기경, 32x43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칼 라르손, 부엌, 20세기경, 32x43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열린 창문 틈으로 흰 커튼이 휘날린다.

예스러운 느낌을 살린 조리대 위로는 각양각색의 조리 도구가 올라가 있다. 잎과 자기, 시계와 서랍장은 공간을 더 풍요롭게 채운다. 그 한가운데 두 딸이 섰다. 품 넓은 치마를 입고, 똑 닮은 신발을 신은 채. 호기심 많은 흰색 고양이는 구석에서 자기 할 일만 한다. 우아하면서 귀엽고, 고풍스럽고도 앙증맞은 장면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부엌>이었다. 모두 칼이 담은 집의 풍경이었다.

칼 라르손, 브리타와 나, 1895

칼 라르손, 브리타와 나, 1895



칼과 카린은 여덟 자녀와 함께 릴라 휘트네스에서 살았다.

아이가 많아질수록 집도 이에 맞춰 불렸다. 새로운 방을 덧붙이고, 정원 울타리 또한 넓혔다. 칼은 그림 의뢰와 전시회 건으로 해외에 있을 때가 잦았다. 그래도 카린이 있어 괜찮았다. 카린은 증축 공사를 직접 감독했다. 쿠션과 식탁보 등 소소한 물건까지 조화롭게 챙겼다. 스스로 옷을 짜고, 자수를 놓고, 심지어 가구의 작은 장식을 디자인한 적도 있었다. 튤립, 수선화, 아프리카산 푸른 백합 등 식물을 집 안팎에서 가꾸는가 하면, 토마토와 아스파라거스 등 채소도 키워 손질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건 밝고, 화려하고, 대담한 색채와 형태였다. 역시나 칼만큼이나 전도유망했던 예술가다웠다. 그녀는 그렇게 자기 방식대로 집에 행복과 평화가 피어날 수 있게끔 했다.

칼 라르손, 피아노를 치는 브리타, 1908, 개인소장

칼 라르손, 피아노를 치는 브리타, 1908, 개인소장



가령 <피아노 앞의 브리타>도 카린의 정성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이다.

딸 브리타가 피아노를 친다. 넓은 녹색 천, 꽃이 가득 담긴 화병, 은은한 갈색 벽과 바닥. 초록빛 조명과 한쪽 벽에 모여있는 오브제 등 모든 게 제자리에서 존재감을 보인다. 공간은 따뜻하고, 향기롭다.

칼 라르손, 브리타, 고양이 한 마리와 샌드위치, 1898, 종이에 수채 등, 47.5x68.5cm

칼 라르손, 브리타, 고양이 한 마리와 샌드위치, 1898, 종이에 수채 등, 47.5x68.5cm



아울러 <브리타, 고양이 한 마리와 샌드위치>를 보면, 카린이 정원 또한 사랑으로 가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생글생글 웃는 딸도 귀엽지만, 키 큰 해바라기 등 촘촘한 식물과 푸른색 울타리도 눈길을 끈다. 잘 닦인 길, 풀에 수염을 댄 고양이도…. 모두 카린이 앞장서 꾸미고 칼이 주도해 그린, 훈훈한 삶의 조각들이었다. 서두에서 소개한 <게임 준비>의 순간 또한 이 조각의 일부였다. 리큐어를 꺼내 드는 카린이 직접 디자인한 앞치마를 두른 모습, 크고 동그란 눈의 두 딸이 짧은 다리를 흔들며 어서 한자리에 모이길 기다리는 장면. 방은 가구와 식기로 빼곡하지만, 난장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림은 존재 자체로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러니까, “네가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는 아버지의 말 앞에 떨고 있는, 아이 시절 칼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선물.

칼은 집과 가족 그림을 실은 책 <나의 가족> 등을 펴낸 적도 있었다.

칼과 카린, 아이들이 함께 꾸미고 누리는 행복의 집은 스웨덴 국민에게 감동을 줬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스웨덴 군인이 성경과 함께 칼의 책을 가장 많이 챙겼다는 설도 있다. 그의 작품이 담긴 책은 국경을 넘어 곧 국경 너머 유럽의 베스트셀러로 주목받았다. 칼의 그림, 카린의 디자인, 릴라 휘트네스의 모습은 오늘날 북유럽식 모던 인테리어의 기초로 역할도 다했다. 나아가 유럽 전역의 장식 문화에 새로운 영감을 주고, 전 세계 인테리어 트렌드에도 영향을 미쳤다. 칼은 어느덧 ‘행복과 정다움을 그리는 화가’로 불리고 있었다.

평화의 뒤편에는…
카린 베르거(라르손), 과일과 항아리가 있는 정물화, 1877, 캔버스에 유채, 56x46cm, 달라르나르 박물관

카린 베르거(라르손), 과일과 항아리가 있는 정물화, 1877, 캔버스에 유채, 56x46cm, 달라르나르 박물관



다만, 그렇다고 해 칼이 매 순간 환희로 삶을 채우지는 않았다.

칼은 살아가면서 꽤 자주 두통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것은 교통사고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증상이었다. 어릴 적 트라우마는 떨친다고 해 쉽게 떨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사랑하는 둘째 울프(Ulf)의 때 이른 죽음도 봐야 했다. 아이는 성인이 되지 못했다. 칼은 그날에도 길게 울어야 했다. 카린 또한 포기한 게 있었다. 화가의 길이었다. 카린에게도 칼 못지않은 잠재력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좋은 아내, 헌신적인 어머니 역할에 나서며 어느 수위의 상실감을 느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한없는 사랑, 가장 솔직하게”
칼 라르손, 한겨울의 희생, 20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640x1360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칼 라르손, 한겨울의 희생, 20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640x1360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한편, 칼의 여러 ‘행복한’ 그림 틈에서도 논란작이 있다는 걸 아는가. 생의 말년에 그린 작품, <한겨울의 희생>이 그것이다.

이는 스웨덴 옛 전설에 등장하는 왕 도말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왕으로 보이는 자가 나체를 훤히 내보이고 있다. 왜? 희생양이 됐기 때문이었다. 당시 스웨덴은 지독한 기근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해결책으로 떠오른 건 밤이 가장 긴 동짓날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일. 그렇다면 이는 ‘의미가 있을수록’ 좋을 터. 그 결과, 끝내 왕이 바쳐졌다는 것이었다. 원래는 스웨덴 국립미술관이 이 그림을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체, 살인, 인신 공양을 그렸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분노를 느낀다. (…) 이 그림은 (…) 내가 죽은 후 언젠가 훨씬 더 나은 곳에서 영광을 누릴 것이다.” 칼은 실망감에 이런 감정을 보이기도 했다(훗날 스웨덴은 일본으로 팔려 간 이 그림을 다시 사들이게 된다).

칼 라르손, 아이들이 잠든 후, 한 집에서, 1894~1898, 종이에 수채, 32x43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칼 라르손, 아이들이 잠든 후, 한 집에서, 1894~1898, 종이에 수채, 32x43cm, 스웨덴 국립 미술관



칼은 60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눈 질환을 앓았다. 두통의 강도도 세졌고, 우울증의 빈도 또한 잦아졌다.

칼은 1919년에 뇌졸중을 겪었다. 급격히 몸이 악화한 그는 결국 그해 눈을 감았다. 카린은 칼이 죽은 후 9년 뒤 삶을 마쳤다. 둘은 영영 떠났지만, 두 사람이 함께한 릴라 휘트네스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곳에는 사랑과 정성이 여전히 깃들어 있었다. 둘은 행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있는 힘을 다해 그 감정을 하늘 높이 피우려고 했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 향기는 울타리 안팎 곳곳에 남았다.

오늘날 릴라 휘트네스는 ‘스웨덴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불린다. 이곳의 온기를 느끼기 위해 매년 세계 각국의 관광객이 문턱을 넘는다. “(집과 집안 가족을 그린)그림에서 나의 개성, 가장 깊은 감정,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했다.” 칼이 남긴 말을 곱씹기도 하며.

참고자료
칼 라르손, 오늘도 행복을 그리는 이유, 이소영, 알에이치코리아

나의 집, 나의 가족, 칼 라르손, 폴리 도슨, 알마

Larssons, Carl Larsson, Bonniers

Puvogel, Renate. Carl Larsson. Cologne: Taschen

Köster, Hans-Curt. The World of Carl Larsson. Penfield: Penfield Books

칼 라르손, 크리스마스이브, 1904~1905, 수채화

칼 라르손, 크리스마스이브, 1904~1905, 수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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