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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숨죽여 있는 일본 내 혐한

조선일보 도쿄=성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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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수적인 단체들이 지난 2020년 7월 24일 도쿄 신주쿠에서 일한국교 단절을 요구하는 혐한 집회를 열었다./유튜브

일본 국수적인 단체들이 지난 2020년 7월 24일 도쿄 신주쿠에서 일한국교 단절을 요구하는 혐한 집회를 열었다./유튜브


10년 전 도쿄의 한 서점에서 산 ‘종한론(終韓論)’이란 책의 저자는 “사실 일본에게 한국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라고 썼다. 이유에 대해서는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빼앗고 식민 지배했다는 건 거짓말이다. 본래 한국은 1000년 넘게 다른 나라의 속국이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일본은 혐한(嫌韓)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뇌피셜(근거 없는 주장)로 한국 폄훼하는 글만 써도 몇천 부가 팔렸다. 운이 좋으면 베스트셀러도 됐다.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이란 혐한 단체의 회원들은 떼를 지어 한국 식당에 몰려가 “꺼지라”며 소리쳤다. 헤이트 스피치(혐오 표현)였고 영업 방해였지만 일본 경찰은 나서지 않았다.

도쿄돔에 K팝 스타를 보려는 일본인 수만 명이 몰리는 2025년의 현재에선 상상 불가한 장면이다. 도쿄 명품 거리인 진구 앞 사거리에는 한국 화장품 브랜드 ‘달바’의 노란색 옥외 광고가 도배된다. 일본 세븐일레븐 편의점에선 ‘김치냄비’와 같은 한글을 붙인 컵라면을 판다.

숱한 혐한론자들은 모두 소멸했을까. 한때 회원 수 1만4000명이라던 ‘재특회’는 현재 활동 여부조차 불분명하다. 홈페이지는 접속 차단됐고 회장이 누군지도 모른다. 연간 900만명 이상 일본을 찾는 한국인들은 혐한은커녕, 그 낌새조차 알아채지 못했을지 모른다.

지난 20일 엽서 한 장이 어김없이 조선일보 도쿄지국에 도착했다. 깨알 같은 손글씨로 앞뒷면을 촘촘히 메운 엽서다. 잘못 쓴 글자는 정성 들여 말끔히 수정했다. 보낸이 주소와 실명은 없다. 우편 소인은 군마현이고 말미엔 ‘가시코’라고 쓰였다. 볼펜 잉크가 군데군데 번진 손때 묻은 엽서엔 “관동대지진 때 일본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은 정당했다”와 같은 혐한의 자기 확신 논리가 가득했다.

가시코는 얼마큼 시간을 들였을까. 흉내 내 써보니 2시간에도 엽서 한 장을 다 못 썼다. 가시코는 이렇게 매달 다른 주제의 혐한 엽서를 보내온다. 추정컨대 10여 년 이상이다. 조선일보 도쿄지국은 한참 전에 같은 건물 4층에서 3층으로 옮겼지만 도착 주소지는 여전히 4층이다.

BTS·트와이스·임윤찬·사랑의불시착·오징어게임·젠틀몬스터·강남언니와 같은 한국 문화에 열광하는 일본인을 만날 때 우쭐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혐한 엽서는 문화적 우월성이란 달콤한 감정 과잉에 빠진 기자를 일깨운다. 혐한을 품은 수만 명의 가시코가 언제 다시 전면에 등장할지 모른다.


일본론의 고전인 ‘공기의 연구’의 분석처럼 혐한은 현재 일본 공기를 지배한 친한을 피해 잠시 숨어있을 뿐이다. 이웃국가 일본과 대등한 이웃으로 사는 길은 감상적인 문화적 우월성에 빠지기보단, 손글씨의 가시코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냉철함을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가시코는 엄연히 존재하는 일본의 숨겨진 얼굴이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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