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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윤의 길을 걸으며] [9]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

조선일보 정수윤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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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라 지하철에 사람이 많다. 다들 떡시루 속에 켜켜이 들어찬 팥시루떡처럼 제 몸을 한껏 납작하게 하고 그 순간을 인내하고 있었다. 그런데 범상치 않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뒷모습에서 빛이 난다. 할아버지는 서서 글씨를 쓰고 있었다. 길게 접은 흰 종이에 붓펜으로 뭘 정성껏 쓰는데,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누가 밀면 밀리는 대로 주변에 개의치 않고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들였다. 쓸 때마다 어깨가 살짝 흔들리는 게 춤이라도 추듯 리듬감이 있다. 나는 호기심이 발동해 사람들을 비집고 다가갔다. 도대체 뭘 쓰고 계시나.

‘비담박무이명지(非澹泊無以明志) 비영정무이치원(非寧靜無以致遠)’ 이걸 몇 번이나 썼다. 예닐곱 정거장 지나니 한글도 쓴다. ‘품성에 담백함이 부족함은 마음에 밝은 뜻이 없기 때문이요,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하지 않으면 큰 뜻을 이룰 수 없다.’ 와… 갑갑한 지하철에서 눈이 확 맑아지는 기분이다. 어지럽던 마음이 정갈해진다. 제갈량이 아들에게 쓴 편지다. 이제 할아버지는 줄여서 ‘담박명지 영정치원’이라고 쓴다. 무의미한 시간에도 마음을 갈고닦으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집에 와 공책을 펴고 따라 적어 보았다. 澹泊明志 寧靜致遠. 역시 글에는 힘이 있다. 주술처럼 쓰며 생각했다. 오늘 지하철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선물한 내년 글귀는 이거다.

자식에게 띄운 편지라면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쓴 것도 있다. ‘남이 알지 못하도록 하려면 그 일을 하지 않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고, 남이 듣지 못하도록 하려면 그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온 세상의 재앙이나 우환, 하늘과 땅을 흔들고 한 집안을 뒤엎는 죄악은 모두가 비밀리에 하는 일에서 생겨나게 마련이니, 일에 임하거나 말할 때는 부디 깊이 살피도록 하여라.’ 역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이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모든 진실이 드러난다는 병오년(丙午年)을 앞두고, 제갈량과 다산이 후손에게 전한 말을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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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윤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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