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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황규인]‘경마계 칸트’ 박태종 기수, 정년이라는 이름의 완주

동아일보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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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박태종 기수(60)는 한국 경마가 한 사람의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다는 걸 몸으로 보여준 사람.”

박 기수의 ‘정년퇴직 레이스’를 함께 준비한 이신우 조교사(45)는 소셜미디어(SNS)에 이렇게 송사(頌辭)를 남겼다. 박 기수는 21일 경기 과천시 ‘렛츠런파크 서울’에서 열린 제6 경주를 마지막으로 정년을 맞았다. ‘미라클삭스’를 타고 경주에 나선 박 기수는 마지막 코너까지 선두를 지키다 결국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 조교사는 “영화처럼 마지막 장면이 우승으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인생이 늘 영화 같을 순 없다. 그래서 이 결과가 더 현실 같았다”고 썼다.

박 기수가 한국 경마에 남긴 기록은 비현실적이다. 박 기수는 총 1만6016번 경주에 나서 그중 2249번 우승했다. 한국 경마 103년 역사상 박 기수보다 우승을 많이 한 사람은 없다. 이전 최다 기록(722번)과 비교해도 우승 횟수가 세 배를 넘는다. 그러면서 얻은 별명이 ‘경마 대통령’이다.

마냥 순탄하게 달려온 건 물론 아니다. 머리와 팔을 빼고 거의 모든 뼈가 최소 한 번은 부러졌다. 장기 입원만 10번이 넘는다. 1999년 낙마 사고 때는 말이 허리를 짓밟는 바람에 척추압박골절로 10개월간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박 기수는 2017년 동아일보 인터뷰 때 “병문안 온 팬들이 ‘당연히 죽었을 줄 알고 영안실부터 갔는데 안 보이길래 입원실로 왔다’고 하더라”며 웃었다.

박 기수는 사실 말이 아니라 굴착기가 타고 싶었다. 충북 진천군 출신인 박 기수는 고교 졸업 후 상경해 이모 부부가 서울 마포구에서 운영하던 채소가게 일을 도왔다. 그리고 짬짜미 중장비 학원에서 굴착기 운전을 배웠다. 강원 춘천시까지 굴착기 면허 시험을 보러 갔지만 운전석에는 앉아 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응시 가능 연령에 몇 달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출생 신고를 1년 늦게 한 바람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적었던 탓이다. 하릴없이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그때 이모부가 한국마사회 마포지점에 붙은 기수 모집 공고를 보고 조카에게 도전을 권했다. 키가 150cm도 되지 않는 박 기수는 “기수라는 직업이 있는 줄도 몰랐지만 단신(短身)이 우대받는다기에 끌렸다”고 했다. 재수 끝에 1987년 기수 면허를 받았다. 박 기수는 이후 39년 동안 매일 오후 9시가 넘기 전에 잠자리에 들어 오전 4시 30분이면 일어났다. 출근 시간은 언제나 오전 5시 30분. 경마계 사람들이 그를 ‘칸트’라고 부른 이유다.


어디 박 기수뿐이랴. 세상살이란, 어린 시절 짐작도 못 했던 일을 하면서, 때로 넘어지고 쓰러져도, 하루하루 버티다, 언젠가 그 자리를 내어주는 과정인지 모른다. 고대 로마 철학자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는 “사는 법을 배우는 데 평생이 걸리고 죽는 법을 배우는 데도 평생이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어쩌면 완주야말로 가장 위대한 기록인지 모른다.

올해 정년을 맞은 모든 분 앞날에 박수를 보낸다. 프랑스 소설가 기욤 뮈소가 ‘천사의 부름’에 쓴 것처럼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은 우리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니 말이다. 정말, 너무, 고생 많으셨다.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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