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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로이드[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22〉

동아일보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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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달린다. 천천히 달려간다. 바라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골목은 못생겼다. 아무렇게나 생긴 곳에서 살아왔다. 거기에는 우산을 쓴 남자가 있었다. 비는 오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행상이 구름 모양의 콘을 내밀고 있다. 나는 달려간다. 죽지 않고 살아왔다.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사랑만 남고 다른 것들은 천천히 말라 죽을 것이다. (중략) 그는 담배를 사서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갔다가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그것을 사진으로 남긴다. 나는 달려간다. 도시는 못생겼다. 죽지 않고 살아왔다.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나는 사진을 열어본다. 그가 웃고 없다.

―유진목(1981∼ )



이 시는 달려가는 시다. 시가 달리니 읽는 사람도 따라 달려야 하는 시다. 달려야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시도 있다. 화자는 멈추는 게 두려워서 달리는 건지도 모른다. 멈춘다는 것은 한곳에서 가만히, 깊이 생각할 시간을 갖는다는 뜻이니까. 화자는 “바라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 한다. “아무렇게나 생긴 곳에서 살아”온 그는 달리면서 진실을 본다. 지나온 날들, 마치 다른 사람의 인생인 듯 흘러가는 자신의 삶을 한 장씩 놓아주는 것 같다.

숨 가쁘게 달리다 보면 비가 오지 않는데도 “우산을 쓴 남자”가 보인다. 담배 한 보루를 사러 갔던 사람. 다른 곳으로 갔다가 올지도, 오지 않을지도 모를 사람. 그러나 그는 화자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화자는 사진을 남기고 기억하고 들여다본다. 달리면서. 사진 속의 그는 웃고 있지만, 동시에 없다. 사랑의 아이러니! “사랑만 남고 다른 것들은 천천히 말라 죽을 것”이라는 예언이 시 속에서 팔딱이며, 달리고 있다.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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