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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미의 멘탈이코노미] 생각 비워야 '무대 공포증'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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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미 정신분석가·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성유미 정신분석가·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아이의 첫 피아노 콩쿠르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아이들은 번호표를 옷에 달고 하나둘 대기실로 들어간다. 보호자는 밖에서 기다린다. 순서가 가까워지면 아이는 무대 한쪽에 올라와 다음 차례를 기다린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상하게도 아이보다 어른들의 표정이 더 긴장되어 괜히 숨을 크게 쉬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한다. 무대에 오르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이 흔들리는 장면은 발표 불안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정작 무대에 오를 아이는 의외로 차분하다. "기다릴 때 무슨 생각 했어? 긴장되지 않았어?" 아이의 대답은 짧았다. "아무 생각 안 했는데. 그냥 멍~했지." 이 말이 오래 남았다. 불안을 없애려 애쓴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발표를 앞두고 사람들이 왜 그렇게 떨리는지, 그리고 왜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담담한지에 대한 답이 이 한마디 안에 들어 있다.

사실 발표 불안을 다루는 데 핵심은 '머리를 비우고, 절차적 수행만 남기는 것'이다. 대개의 발표는 예술적 영감이 필요한 일이 아니며 즉흥 연주도 아니다. '순서가 있는 작업'이다. 순서만 기억하면 뇌는 자동으로 실행 모드에 들어간다. 문제는 발표를 '작업'이 아니라 '평가받는 장면'으로 바꿔버린다는 데 있다. 불안은 실행이 아니라 판단 모드에서 생긴다. 발표 자체는 단순한데, 이를 둘러싼 생각들이 발표를 어렵게 만든다.

이는 스포츠 선수들의 이야기에서도 반복된다. 피겨 선수 김연아는 스트레칭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에 "생각은 무슨 생각을 해요. 그냥 하는 거지"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은 수행의 순간에 생각이 얼마나 불필요한지를 단번에 정리해주고 있다. 최고의 순간은 더 잘하려 애쓰는 순간이 아니라 준비된 것을 의심 없이 실행할 때 나온다. 야구에서도 타석에 들어설 때 이런저런 계산이 몰려오면 몸이 굳는다는 걸 알았던 강민성 선수는 모자에 'Just do it'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고 한다. 결과를 예측하지 말고 지금 해야 할 스윙 하나에만 집중하자는 신호다.

피아노 콩쿠르의 아이도 다르지 않았다. 훈련과 준비는 끝났고 연습은 이미 몸에 남아 있다. 그래서 무대 위에서는 더 애쓰지 않았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단순한 순서만 남아 있었다. '내 차례가 되면 무대에 올라간다→피아노 앞에 앉는다→연주한다→내려온다'. 생각이 빠지자 흐름만 남았다. 결과나 평가, 비교 같은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다만 많은 어른에게 이 단순함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미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도한 생각들은 대개 아무 이유 없이 생긴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나 충격을 완화하거나 불안을 덮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방어 장치인 경우가 많다. 계속 생각함으로써 대비하고 통제하려 했던 습관이 굳어진 결과다. 이런 상태는 흔히 신경증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며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것 자체가 증상이 되기도 한다. 이럴 때는 발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안전해질 수 있도록 돕는 치료적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향은 분명하다. 발표를 비교적 편안하게 하는 사람들은 준비와 수행을 구분한다. 준비할 때는 충분히, 성실하게 연습한다. 수행의 순간이 오면 이미 해 온 자신을 믿고, 있는 그대로 실행한다. 수행의 순간에 필요한 건 각오가 아니라 신뢰다. 결국 결론은 단순하다. 그냥 하는 것, 그게 제일 좋다. 발표는 완벽함을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준비한 것을 차분히 꺼내놓는 과정이다. 충분히 준비했다면 이제 자신을 믿고 순서에 맡길 때 발표는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성유미 정신분석가·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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