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현 기자]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 확산과 글로벌 전력망 교체 수요가 맞물리며 2025년은 전력기기 산업의 판이 완전히 달라진 해로 기록됐다. 전력 인프라가 더 이상 보조 설비가 아닌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떠오르면서 변압기·차단기·배전 설비 등 전력기기 전반이 글로벌 공급 병목의 중심에 섰기 때문이다.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 HD현대일렉트릭 등 국내 전력기기 3사가 각기 다른 전략과 오너들의 강력한 리더십을 등에 업고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토털 전력솔루션 효성重, 조현준의 '기술 집념' 통했나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 HD현대일렉트릭 등 국내 전력기기 3사가 각기 다른 전략과 오너들의 강력한 리더십을 등에 업고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토털 전력솔루션 효성重, 조현준의 '기술 집념' 통했나
효성중공업은 2024년 국내 최초로 HVDC(초고압직류송전) 독자 기술을 개발을 완료하며 2025년에는 단순 수주 확대를 넘어 사업의 질적 도약을 이뤄냈다.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이 직접 챙겨 온 HVDC 기술 내재화 전략이 본격적으로 시장에서 평가받기 시작한 해라고 볼 수 있었다.
그간 국내 전력기기 업체들은 HVDC 프로젝트에 참여하더라도 특정 기자재 단위에 머물렀다. 효성중공업은 글로벌 시장에서도 손에 꼽는 HVDC 독자 기술 소유자로 시스템 설계, 기자재(컨버터, 제어기, 변압기 등) 생산까지 가능한 '국내 유일 HVDC 토탈 솔루션 제공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2025년 3분기 기준 누적 수주 잔고는 11조원을 돌파하며 가파른 성장세를 증명했다.
미국 최대 송전망 운영사와는 765kV(킬로볼트) 초고압변압기, 리액터, 차단기 등 한국 업체 최초로 전력 솔루션을 풀 패키지로 공급했으며, 8~9월에만 미국에서 초고압 전력기기 2000억원 이상의 수주 성과를 이뤘다.
결정적인 성과는 전력기기의 본고장인 유럽 시장에서의 입지 강화다. 엄격한 품질 기준과 장기 신뢰도를 요구하는 유럽 전력 시장을 기술력으로 정면 돌파했다.
상반기 영국 스코틀랜드 스코티쉬 파워와 850억원 규모의 초고압변압기 공급 계약 체결에 이어 12월에도 스코틀랜드 전력망 운영사 SPEN과 약 1200억원 규모의 초고압변압기 수주를 따냈다.
유럽 내 수주 영토도 빠르게 확장했다. 프랑스 송전업체와의 추가 공급계약은 물론 국내 전력기기 업체 최초로 독일 시장에 진출하며 서유럽 전역으로 수주 범위를 확장했다. 이어 스웨덴과 노르웨이 등 북유럽 전반에서의 성과에 더해 스페인 주요 전력·에너지 기업과 변압기·리액터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남유럽에도 첫 발을 내디뎠다. 이로써 유럽 전역에서의 포트폴리오를 완성했다는 평가다.
독보적 기술력 없이는 진입 장벽이 높은 유럽 시장에서 기술 신뢰도 역시 입증했다. 600MVA(메가볼트암페어) 초고압 변압기로 프랑스 송전망 운영사 RTE의 초고압변압기 단락시험을 통과했다. 단락시험은 극한 전기적 부하 상황에서도 변압기의 안정성을 검증하는 가장 까다로운 시험으로, 인증받은 제품은 프랑스 내 최대 용량으로 약 50만가구의 전력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 이는 유럽 최고 수준의 안정성 기준을 충족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사례로 평가된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성과를 두고 조현준 회장의 '기술 경영' 성과라고 평가한다. 조 회장은 평소 "기술이 뒤처진 제품이나 불량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며 전력기기는 수명이 긴 제품인 만큼 고객에게 뒤처지지 않는 신뢰를 주는 '초격차 기술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AI 산업의 성장에 따라 전력시장의 핵심인 전력기기 공급사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의지 아래에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공장에 1억 5700만달러 투자로 생산 능력 확대, 네덜란드 R&D(연구개발) 거점을 마련하는 등 공격적인 투자로 시장 지배력을 공고히 한다는 방침이다.
조 회장은 "효성의 경쟁 무대는 국내가 아니라 전 세계. 해외 시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성과를 만들어낸 과정이 경쟁력이 된다"며 "회사는 앞으로도 해외 시장에서 역량을 발휘하는 글로벌 인재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美 데이터센터 공략 LS일렉트릭, 그룹 합작으로 국내 선점도
LS일렉트릭은 '데이터센터 특화 전력 솔루션 기업'으로의 전환을 본격화했다. 단순 전력기기 공급사를 넘어 AI 시대 전력 인프라의 핵심 파트너로 포지셔닝을 바꿨다는 평가다.
2025년 LS일렉트릭의 데이터센터 관련 수주액은 1조원을 돌파했으며, 이 가운데 북미 비중이 80% 이상을 차지했다. 데이터센터 전력 공급의 핵심으로 꼽히는 배전 솔루션 분야에서의 경쟁력이 두드러졌다. 국내 배전기기 시장 점유율 약 70%를 기반으로 배전반 전력 자동화 시스템 보호 계전 솔루션을 패키지로 공급하며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선택을 받았다는 분석이다.
구자균 회장은 '인터배터리 2025'에서 "초고압변압기 다음으로 배전 변압기를 많이 신경쓰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의지를 바탕으로 구 회장은 지난 4월 준공된 미국 배스트럽 캠퍼스를 직접 챙기며 북미 현지화 전략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현지 생산 거점은 북미 시장 확대의 전초기지"라고 강조하며 영업 최전선에서 '세일즈 회장'의 면모를 보였다.
LS일렉트릭은 텍사스와 유타주에 생산 거점을 구축했다. 송전망 구축 대비 리드타임이 짧고 데이터센터 완공 시점에 맞춰 즉시 투입돼야 하는 배전기기의 특성상 현지 생산 능력을 갖춰 수주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는 전략이다.
유럽 시장 공략도 시동을 걸었다. 영국 배전반 제조사 일렉시스와 함께 영국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요구가 확대되는 높은 차단용량과 안전성의 괏양 배전반 솔루션 공동 개발에 나섰다. LS일렉트릭은 영국을 시작으로 유럽 주요국에서 고객 맞춤형 전력 솔루션을 제공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그룹 차원의 지원도 힘을 보탰다. 구자은 LS그룹 회장은 정부 주도의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 사업을 미래 성장의 분기점으로 보고 경영 전면에 나섰다. LS전선의 HVDC 케이블부터 LS일렉트릭의 전력기기·시스템을 아우르는 LS그룹의 밸류체인을 활용해 국내 전력망 대전환 프로젝트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구자은 회장은 LS일렉트릭 부산 사업장 초고압 변압기 제2생산동 준공식에서 "이곳 부산사업장은 정부의 '에너지 고속도로' 실현의 중추적 역할을 할 것"이라며 "LS그룹은 전력 인프라의 심장(초고압변압기)과 대동맥(초고압/해저케이블)을 모두 갖춘 글로벌 리더로서 대한민국 에너지 산업의 미래를 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HD현대일렉트릭 미국 알라바마 법인 전경. 사진=HD현대일렉트릭 |
효자로 급부상한 HD현대일렉트릭, 정기선 '퓨처 빌더' 비전 핵심으로
HD현대일렉트릭은 조선업을 주력으로 하고 있는 그룹사 내에서 시장 호조세를 타며 '효자 계열사'로 떠올랐다. 1분기 매출 1조원 달성을 시작으로 매 분기 성장 곡선을 그렸으며 꾸준한 해외 수주로 실적과 전략 양 측면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북미, 중동, 국내와 더불어 유럽을 4대 핵심 수출 시장으로 육성하겠다는 의지로 유럽 시장 집중 공략에 나섰다. 5월 스코틀랜드 전력회사와 초고압변압기 공급계약을 체결했으며, 6월엔 노르웨이에선 벌크 인프라스트럭처의 데이터센터 건설 프로젝트의 전력기자재 입찰 우선 참여 기회도 확보했다.
특히 탈탄소화를 선도하고 있다는 유럽 시장의 특성을 반영해 친환경 변압기 시장을 공략했다. 친환경 변압기는 절연유를 기존 원유 기반 광유 대신 자연 분해되는 식물유 기반의 합성유로 대체한 제품으로 신재생에너지 발전소 및 도심 지역 등 민감한 산업 시설에 적합하다. 국내 최초 독자 개발한 제품인 '145kV SF6-Free 고압차단기'로는 스웨덴, 핀란드 등지에서 수주 성과를 이어갔다.
정부가 아랍에미리트(UAE)가 진행 중인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교두보를 마련하면서 HD현대일렉트릭이 해당 사업에 참여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대규모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사업으로 전력기기 업체 중 중동 국가에 전력기기를 공급한 실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초대형 특수변압기 개발, 그룹 내 조선 계열사와 전기추진 함정 국산화를 위한 고압 추진 드라이브 제품 개발 등 기술 및 제품에 있어 다방면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특히 조선·해양 플랜트에서 축적한 고신뢰·대형 설비 제작 경험이 전력기기에서도 경쟁력이 됐다는 평가다. 극한 환경에서도 안정성을 요구받는 조선·해양 분야의 품질 기준이 장수명·고안정성을 중시하는 전력기기 시장과 맞아 떨어졌다는 분석이다.
HD현대그룹의 새 회장 자리에 오른 정기선 회장이 취임 첫 메시지로 "퓨처 빌더"를 강조하며 신사업 확장의 과제도 안게 된 만큼, HD현대일렉트릭이 인프라로 탄탄하게 뒷받침할 전망이다. 정기선 회장은 2026년 1월 준공을 앞둔 청주 HD현대일렉트릭 배전캠퍼스 건설 현장을 찾아 "배전캠퍼스가 HD현대일렉트릭의 또 다른 퀀텀점프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슈퍼사이클 단계 넘는다…성장 가능성 '무궁무진'
한편 전력기기 산업은 단순한 경기 변동을 넘어 글로벌이 전기에너지 중심으로 재편되는 전기화라는 구조적 성장 단계에 진입했다.
글로벌 전력망 투자 규모는 2030년까지 매년 10% 이상 증가해 약 7770억달러(약 1000조원) 수준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포춘 비즈니스 인사이트에 따르면 글로벌 AI 시장은 2025년 약 2942억달러에서 2032년 1조 7716억달러로 연 평균 29%씩 폭증할 것으로 예측되며 이에 따른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 증가율은 일반 산업 평균 대비 2.4%에 달한다.
여기에 미국 에너지부(DOE)의 송전망 재건 대출 보증 등 각국 정부의 인프라 투자 지원이 더해지며 전력기기 수요는 장기간 이어질 전망이다.
한 전력업계 관계자는 "2025년 AI 데이터센터로 전력 수요 증가세의 수혜를 자연스레 입어 업계 전체가 잘 됐다"면서도 "어디까지 전력시장이 고점을 찍을지 예측이 불가한 만큼 올해의 성장은 아직 시작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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