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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심 상한다"며 '박정민 청룡열차'서 왜 못 내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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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⑤ 2025년 '응시의 아이콘' 박정민
갈등에도 고유성 인정... 화사 '굿 굿바이'로 '국민 전 남친'
국내선 '1일 1박정민', 해외선 '4분 퍼포먼스' K드라마처럼
"'이대남'과 달라" 새 남성상 환기 시각도

편집자주

격변의 시대, 세상은 곳곳에서 뒤바뀌고 있습니다. 대중문화에서 그 역전의 순간을 포착해 사회·문화적 변화를 짚어 봅니다.


박정민(왼쪽)과 화사가 지난달 열린 청룡영화상에서 '굿 굿바이'를 함께 부르고 있다. KBS 영상 캡처

박정민(왼쪽)과 화사가 지난달 열린 청룡영화상에서 '굿 굿바이'를 함께 부르고 있다. KBS 영상 캡처


화사가 '굿 굿바이' 춤을 출 때 박정민은 그를 동요 없이 쳐다본다. 박정민은 '2025년 응시의 아이콘'이다. KBS 영상 캡처

화사가 '굿 굿바이' 춤을 출 때 박정민은 그를 동요 없이 쳐다본다. 박정민은 '2025년 응시의 아이콘'이다. KBS 영상 캡처


'하던 일 다 멈추고 신발 가져다줬더니 바닥에 툭 던져 버리네.'

'신발? 아니 괜찮아, 필요 없어. 여기 마이크나 잡아, 이런 느낌이잖아요.'

이달 초 미국 해병대 출신 남성 유튜버(@ThisRoscoe)와 현지 여성 가수(@Katriinka)가 각자 자신의 유튜브에 한국의 한 시상식 축하 공연을 전하며 이런 감상평을 올렸다. 두 외국인을 공연 속 한국 남녀로 훅 감정 몰입하게 만든 영상은 가수 화사와 배우 박정민이 지난달 열린 청룡영화상에서 선보인 '굿 굿바이' 축하 공연. 최근 유튜브엔 이렇게 외국인들이 찍은 '화사·박정민 '굿 굿바이' 공연 리액션 영상'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박정민과 화사의 청룡영화상 축하 공연을 보며 웃고 있는 미국 해병대 출신 로스코. 로스코 유튜브 영상 캡처

박정민과 화사의 청룡영화상 축하 공연을 보며 웃고 있는 미국 해병대 출신 로스코. 로스코 유튜브 영상 캡처


박정민과 화사의 청룡영화상 축하 공연을 리뷰하고 있는 미국 가수 카트린카. 카트린카 유튜브 영상 캡처

박정민과 화사의 청룡영화상 축하 공연을 리뷰하고 있는 미국 가수 카트린카. 카트린카 유튜브 영상 캡처


미국까지 달린 '박정민 청룡열차'

영화상 축하 공연에서 화사는 박정민 주위를 돌며 맨발로 춤을 추고, 그가 벗어둔 빨간색 구두를 손에 든 박정민은 1분여 동안 화사를 무심히 바라본다. 외국인들은 이 4분 남짓의 K팝 퍼포먼스를 마치 K드라마처럼 즐겼다. 두 남녀의 이별 과정을 다룬 K팝 퍼포먼스가 국내에서 워낙 화제가 되다 보니 그 입소문이 해외까지 퍼진 여파다.

미국 버지니아주에 산다는 로스코는 23일 한국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유튜브 구독자 커뮤니티에서 '화사와 박정민 영화상 축하 공연 리액션 콘텐츠를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많아 영상을 찍었다"며 "두 사람의 퍼포먼스는 균형 잡힌 아름다운 관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지지하는 파트너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은근히 던진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라고 했다. 화사의 독자성과 그 모습을 지지하는 박정민의 응시, 이 공존이 지난 미국 대선으로 뚜렷하게 드러난 남녀 갈등을 우려하는 현지인들의 눈에도 새삼 특별하게 비치고 있는 것이다.

박정민이 유튜버 침착맨의 최근 생방송 라이브에서 청룡영화상이 끝난 후 배우들과 회식 자리에 가지 않고 게임을 하기 위해 집에 온 과정을 말하고 있다. 침착맨 유튜브 영상 캡처

박정민이 유튜버 침착맨의 최근 생방송 라이브에서 청룡영화상이 끝난 후 배우들과 회식 자리에 가지 않고 게임을 하기 위해 집에 온 과정을 말하고 있다. 침착맨 유튜브 영상 캡처


환상 대신 현실을 추구한 배우의 반전

이렇게 해외까지 입소문 난 '신발 로맨스'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또 다른 나비효과를 낳고 있다. 박정민이 '국민 전 남친'으로 급부상한 것. 시상식 축하 공연과 '굿 굿바이' 뮤직비디오에서 화사의 전 남자 친구로 보여준 그의 눈빛과 태도가 여성들에게 설렘을 안기며 박정민은 새로운 로맨스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는 2011년 데뷔 후 단 한 번도 달콤한 멜로 연기를 한 적이 없다. 사이비 종교에 심취(영화 '사바하')해 무기력(영화 '파수꾼'·'변산', 드라마 '뉴토피아')한 청년으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굴곡 많고 그늘지게 살았던 배우의 반전이다. 박정민은 '꽃미남 스타'가 아니다. 영화상 시상식이 끝난 당일 연예인들과 회식에서 와인 잔을 기울이는 대신 집으로 가 온라인 게임 대회에 접속했다. 연예인치고 평범한 그의 모습과 친근한 일상은 판타지 대신 접근 가능성 즉 '현실감'을 키웠다. "만약 차은우가 화사의 상대였다면 이렇게 몰입하지 않았을 것"이란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미남'의 기준이 바뀐 게 아니라 매력의 작동 방식이 달라진 셈이다.

박정민 구글 검색량 변화 추이. 지난 11월 23일쯤 폭증했고 그 이후에도 예년보다 높은 관심도를 보이고 있다. 11월 19일 청룡영화상 공연 이후 변화다.

박정민 구글 검색량 변화 추이. 지난 11월 23일쯤 폭증했고 그 이후에도 예년보다 높은 관심도를 보이고 있다. 11월 19일 청룡영화상 공연 이후 변화다.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 속 박정민의 모습. 그는 트렌스젠더로 나온다. CJ ENM 제공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 속 박정민의 모습. 그는 트렌스젠더로 나온다. CJ ENM 제공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속 박정민의 영상에 올라운 댓글. 온라인엔 '박정민 청룡열차'를 탄 여성들의 흔적이 쏟아지고 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속 박정민의 영상에 올라운 댓글. 온라인엔 '박정민 청룡열차'를 탄 여성들의 흔적이 쏟아지고 있다.


"기대고 싶다" 포용의 아이콘으로도

그간 비주류 행보를 걸어왔던 배우에 쏠린 주류의 반응은 신드롬급이다. 한 번 타면 내리기 어렵다는 '박정민 청룡열차(청룡영화상 공연 영상을 보고 박정민에 '입덕'하게 된 것을 일컫는 말)'에 올라타 온갖 박정민 콘텐츠를 찾아보며 '1일 1박정민' 하는 여성들이 폭증하고 있다. 8년 전 나온 그의 산문('쓸 만한 인간') 오디오북은 갑자기 베스트셀러가 됐고,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그의 공연 회차 티켓은 일찌감치 동났다. 박정민은 K팝 시장까지 뒤집었다. '굿 굿바이'는 지난달 톱 10에서 밀려나며 잊힐 뻔하다 '박정민 청룡열차' 세례 후 갑자기 차트 순위가 수직 상승해 '골든'까지 제치고 올 연말 유튜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노래(11월 21일~12월 18일)가 됐다. 상업적 흥행과 그간 거리가 멀었던 박정민이 올해 대중문화에서 '역전'의 아이콘으로 손꼽히는 배경이다.

박정민의 이런 주류적 부상은 ①배우의 예상치 못한 이미지 뒤집기를 화제의 땔감으로 ②'남성성을 지니면서도 무해한 이성'에 대한 여성들의 갈증이 활활 타오르면서 이뤄졌다. ③이 화제의 불길을 알고리즘은 '박정민 현상'으로 키웠다. "박정민에 기대고 싶다"는 목소리까지 나오면서 '포용의 아이콘'으로까지 주목받는 분위기다. 이른바 '박정민 신드롬'은 대중문화와 미디어 플랫폼 속 취향을 둘러싼 산업의 격변과 이성 담론의 사회적 변화로 나타난 유행이란 분석이다.


영화 '사바하'(2019) 속 박정민의 모습. CJ ENM 제공

영화 '사바하'(2019) 속 박정민의 모습. CJ ENM 제공


영화 '변산'(2018) 속 박정민의 모습.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제공

영화 '변산'(2018) 속 박정민의 모습.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제공


'박정민 청룡열차' 인증글. 사회관계망서비스 캡처

'박정민 청룡열차' 인증글. 사회관계망서비스 캡처


"'개념충' 반감 있었는데" 마음 바뀐 이유

"솔직히 별로 관심 없었어요. '고려대 출신(중퇴)이다' 이거 빼고 딱히 제가 좋아하는 얼굴도 아니어서요. '책 좋아한다' '출판사 차린다' 할 땐 '개념충 콘셉트 절정을 달리는구나' 했거든요. 반감도 좀 있었는데 시상식 축하 무대랑 '굿 굿바이' 뮤직비디오 보니 '댄디남'으로 보이는 거예요. 화사가 춤추며 혼자 난리 치는데 박정민은 무심하게 그걸 다 받아주고. '아, 저런 남자 어딨나' '남편 바꾸고 싶다' 막 이런 생각 들고요."

초등학생 자녀를 둔 ㅇ씨는 이렇게 '박정민 청룡열차'를 탔다. 한국 멜로 영화 사상 처음으로 400만 관객을 돌파한 '건축학 개론'(2012)의 흥행으로 주연 배우 수지처럼 '국민 첫사랑'으로 불리는 것도 아니고, 고작 4분 남짓의 축하 공연과 뮤직비디오로 '국민 전 남친' 대접이라니. '굿 굿바이'로 박정민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20~40대 여성 13명을 인터뷰해 보니, 그의 매력으로 모두 '나와 다른 상대에 대한 포용'을 꼽았다.

이런 반응은 20대 남녀 즉 현실 속 '이대녀'의 '이대남' 불신과 무관하지 않다. "화사가 혼자 흥에 취해 춤을 춰도 '그래, 놀아' 하듯이 옆에서 뒷짐 지고 지켜보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화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줘 '어른 남자'의 여유"(ㅅ씨, 20대)를 느끼고 "'얘(화사)를 꼬셔서 어떻게 해야겠다'가 아니라 '얘의 자유로운 모습 그대로가 좋기 때문에 바라보고 챙겨준다'는 느낌이라 '유죄남(상대가 부담스럽지 않은 다정함으로 설렘을 주는 남자를 일컫는 Z세대 용어)' 같았고 '이대남'과 달라 보여"(ㅂ씨, 20대) 호감이 급상승했다고 한다.


'굿 굿바이' 뮤직비디오에서 박정민은 자유분방한 화사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취향이 극과 극으로 달라 서로 다른 이어폰을 꽂고 각기 다른 음악을 들을지언정 함께 있는다. 제멋대로 구는 화사에 박정민은 때론 버럭 화도 내고 짜증도 부리지만, 노래 제목처럼 '안녕하게 작별' 한다. 상대가 못마땅하지만 그 개성을 지켜주는, 그는 '안전한 남자'다. 이지행 전북대 K엔터테인먼트학과 교수는 "'국민 전 남친 박정민'에 대한 환호는 무해하고 평범한 남성성이 주는 정서적 안정감이 새로운 '성적 매력 자본'으로 편입된 결과"라고 짚었다.

박정민이 낸 산문집 '쓸 만한 인간' 표지.

박정민이 낸 산문집 '쓸 만한 인간' 표지.


'박정민 청룡열차' 유행 관련 누리꾼의 글.

'박정민 청룡열차' 유행 관련 누리꾼의 글.


'박정민 청룡열차' 유행 관련 누리꾼의 글.

'박정민 청룡열차' 유행 관련 누리꾼의 글.


'박정민 청룡열차' 유행 관련 누리꾼의 글.

'박정민 청룡열차' 유행 관련 누리꾼의 글.


'박정민 청룡열차' 유행 관련 누리꾼의 글.

'박정민 청룡열차' 유행 관련 누리꾼의 글.


"원하는 대로 행동 교정하는 K팝 아이돌 시대의 반작용"

박정민을 향한 뜨거운 관심은 대중문화 속 새로운 로맨스 캐릭터의 등장으로도 해석된다. 복길 대중문화 평론가는 "자기 것이 분명하게 있고 그래서 교정되지 않을 박정민에 대한 호응은 내가 원하는 대로 여론을 만들어 K팝 아이돌의 행동을 교정하는 시대에 요즘 대중문화 속 남성성이 같은 파자마를 입고 거의 여자 친구 수준으로 '궁극의 우정'처럼 그려지는 흐름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바라봤다.

"'나한테 무조건 잘해주는 그런 거 말고 '헤어지면서 미련은 남지만 지질하게 매달리지는 않는' 그런 남자다운 매력"(ㄱ씨, 40대)을 박정민에게 찾고, 그 영상 속 매력은 또 "책을 통 읽지 않는다는 시대 되레 독립 출판사를 차리는 박정민의 고집 그리고 그 소신에 겁내지 않는 모습"(ㅊ씨, 30대)과 포개지면서 힘을 발휘했다.

박정민은 '굿 굿바이' 뮤직비디오에서 제멋대로 구는 화사에 화도 내고 짜증도 낸다. 그렇지만 그는 좋게 작별한다. '굿 굿바이' 뮤직비디오 캡처

박정민은 '굿 굿바이' 뮤직비디오에서 제멋대로 구는 화사에 화도 내고 짜증도 낸다. 그렇지만 그는 좋게 작별한다. '굿 굿바이' 뮤직비디오 캡처


영화 '동주'(2016) 속 박정민의 모습.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제공

영화 '동주'(2016) 속 박정민의 모습.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제공


"서 있는 것까지 좋아해야 돼?" 알고리즘 시대 질문

물론, 모두가 '박정민 청룡열차'를 탄 건 아니다. "그냥 저러고 서 있는 것까지 좋아해야 하나"(ㄴ씨, 30대)며 이 유행을 당황스러워하는 여성들도 적잖다. "알고리즘 추천으로 SNS에 하도 떠 세상이 내게 '박정민을 좋아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았다"(ㄱ씨, 30대)거나 "평소 딱히 설렘 없는 '명품 조연' 같은 느낌이었다가 이번에 '굿 굿바이'로 더 보기 좋아지긴 했는데 그렇다고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좀 (자)존심 상한다"(ㅊ씨, 20대)는 이들도 있었다.

'박정민 현상'은 결국 SNS의 알고리즘이 어떻게 집단의 유행을 만들어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교수는 "'박정민 현상'은 개인의 은밀한 취향이 알고리즘을 통해 집단적 서사로 승격된 걸 보여주는 사례"라며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지만 사실은 알고리즘이 선택한 대로 따라간 '만들어진 집단 취향' 즉 '알고리즘의 부족화' 현상 측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고 봤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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