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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연말 기억에 남을 하루를 위한 단 하나의 와인 [이환주의 와인조이]

파이낸셜뉴스 이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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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의 약속, 뉴질랜드 '크래기 레인지'

크래기 레인지의 아시아 담당 매니저 마크 컨리프가 크래기 레인지 와인이 생산되는 뉴질랜드 혹스베이 지역의 자연이 찍힌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이환주 기자

크래기 레인지의 아시아 담당 매니저 마크 컨리프가 크래기 레인지 와인이 생산되는 뉴질랜드 혹스베이 지역의 자연이 찍힌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이환주 기자


[파이낸셜뉴스]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 줄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에서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받았다는 증거로서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이미 내 존재 안에 있다"라는 문장도 나온다. 어쩌면 '죽음'이란 것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타인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것일지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누군가의 존재는 부재를 통해 더 뚜렷하게 각인된다. 함께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몰랐던 누군가를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의 존재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종국에는 '존재=기억'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유튜버 최군이 생방송을 하던 어느날 한 시청자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연을 전하자 이렇게 위로를 해줬다. 그는 "자신 역시 7년 전에 어머니를 잃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한 뒤에 "어머니가 살아 있어도 서로 멀리 떨어져서 몇 년 동안 못보기도 하는 것처럼 어머니는 돌아가신게 아니라 멀리 여행을 떠나서 조금 더 오랫동안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자"고. 그러면서 "어머니가 사라진 게 아니라 눈에만 안 보이고, 가슴 속에 있는 거야"라고. 어머니의 기억이 있는 한 어머니는 기억하는 자아 속에서 존재하며 살아 있는 것이란 뜻이었을까.


특별한 날에 특별한 와인을 특별한 사람과 먹는 것은 분명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다. 물론, 우선 순위를 논하자면 특별한 사람, 특별한 날, 특별한 와인 순이겠지만.

테 무나 로드 빈야드 소비뇽 블랑 2024(화이트), 혹스 베이 김블렛 그라벨스 시라 2021(레드), 소피아 2021(레드).

테 무나 로드 빈야드 소비뇽 블랑 2024(화이트), 혹스 베이 김블렛 그라벨스 시라 2021(레드), 소피아 2021(레드).


1000년의 약속, 뉴질랜드 '크래기 레인지'

"1000년 동안 절대로 이 와이너리는 팔지 않겠다."
뉴질랜드의 와이너리 '크래기 레인지'를 창업한 테리 피바디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그는 여러 산업 분야를 넘나들며 사업가로서 성공했다. 그는 사업가로서 단순한 부의 축적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남을 유산을 찾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1980년대 중반 테리는 아내 메리와 함께 전 세계를 여행하며 고급 와인 문화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두 사람은 세계 최고의 와인 산지를 찾아다니며 가능한 모든 포도 재배지를 조사하기로 결심했다. 프랑스 보르도,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오스트레일리아 마가렛 리버 등을 돌아봤지만 어느 곳도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1997년 둘은 마침내 뉴질랜드 북섬의 '혹스 베이'에 매료된다. 고생대 퇴적층의 자갈이 드러난 김블렛 그라벨스의 거친 땅은 그들에게 단숨에 새로운 비전의 시작점이 됐다. 1998년 그들은 크래기 레인지 와이너리의 첫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는 첫 포도나무를 심고 '1000년 신탁'을 만들었다. 세대가 바뀌고 문명이 바뀌어도 절대 이 땅을 팔지 않고 1000년의 역사를 이어가겠다는 다짐이었다.

크래기 레인지는 2023년 '더 리얼 리뷰'로부터 뉴질랜드 최고의 와이너리 1위에 선정됐다. 2018년 첫 등재 이후 꾸준히 뉴질랜드 최고 와이너리 4위 안에 들었다.


뉴질랜드는 화이트? 크래기 레인지의 프리미엄 레드


지난 11월 어느날 크래기 레인지의 아시아 담당 매니저 마크 컨리프와 함께 크래기 레인지의 와인을 맛볼 수 있었다.

첫번째 와인은 '크래기 레인지, 테 무나 로드 빈야드 소비뇽 블랑 2024(화이트)' 이었다. 같은 와인 2023년 빈티지는 미국의 대표 와인 전문지 와인스펙테이터에서 94점으로 그해 소비뇽 블랑 가운데 1등을 차지했다. 이후 싱가포르 항공 비즈니스 클래스의 와인 리스트에 올랐고 전세계 항공사로부터 많은 문의를 받았다.

마크는 "전세계 유명 항공사의 와인 리스트는 숫자가 매우 제한되기 때문에 항공사의 선택을 받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며 "기회가 되면 대한항공에서도 크래기 레인지의 와인을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뉴질랜드는 생산되는 와인의 약 96%가 화이트 와인이다. 또 화이트 와인 중에서 소비뇽 블랑 와인이 89%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마크는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은 다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크래기 레인지가 생산되는 마틴러버는 뉴질랜드 대표 와인 산지인 말로보와 비교해 기후가 낮아 유럽의 소비뇽 블랑과 스타일이 흡사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뉴질랜드 화이트 와인의 경우 상대적으로 신대륙 와인에 속해 '프리미엄 급' 와인 출시가 쉽지는 않은 상황이다.

테 무나 로드 빈야드 소비뇽 블랑 2024(화이트)

테 무나 로드 빈야드 소비뇽 블랑 2024(화이트)


이날 두 번째로 코르크를 딴 와인은 '크래기 레인지, 혹스 베이 김블렛 그라벨스 시라 2021(레드)'였다. 뉴질랜드 혹스 베이의 자갈 토양에서 자란 시라 포도로 많은 고급 레드 와인이다. 풍부한 과일 향과 스파이스, 부드러운 탄닌, 미네랄리티를 조화롭게 담아낸 와인이다. 뉴질랜드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을 잇는 교두보로서 손색이 없었다. 페어링 하는 음식도 애피타이저와 샐러드 같은 가벼운 음식에서 육회로 이어졌다.

혹스 베이 김블렛 그라벨스 시라 2021(레드)

혹스 베이 김블렛 그라벨스 시라 2021(레드)


육회 타르트

육회 타르트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크래기 레인지, 소피아 2021(레드)'였다. 와인의 라벨부터 앞선 두 와인과 달랐다. 마크는 와인이 생산되는 혹스베이 지역의 평야와 산지 사진을 보여 주며 "프리미엄 와인의 라벨은 상단 부분이 평평하지 않고 산처럼 솟아 있다"고 설명했다.

크래기 레인지는 각각 메를로, 샤르도네, 시라, 피노 누아를 위주로 4가지 프리미엄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소피아는 김블렛 그래블스에서 메를로 위주로 소량만 생산되는 와인이다. 손 수확한 메를로 77%와 카베르네 프랑 23%를 사용했다. '소피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지혜를 의미하는 이름으로 와인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경험, 지혜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의미를 담았다. 현재 한국에 수입되는 크래기 레인지의 프리미엄 와인은 소피아가 유일하다.

소피아 라벨의 상단은 높게 솟아난 혹스베이의 산맥을 닮았다.

소피아 라벨의 상단은 높게 솟아난 혹스베이의 산맥을 닮았다.


화이트 와인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뉴질랜드이지만 프리미엄 라인 4개 중 샤르도네를 제외한 3가지 품종이 레드인 이유에 대해 마크는 "아직은 뉴질랜드 화이트 와인에 대한 가격 천장이 있다"며 "향후 소비뇽 블랑 프리미엄 와인이 나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크래기 레인지는 사람들이 오늘의 순간을 축하할 뿐만 아니라 세대와 미래를 생각하며 마시는 와인이다. 그의 천년 약속은 시간 속에 묻힌 뿌리가 땅과 하늘을 잇는 다리가 되는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정설은 아니지만 소피아라는 와인의 이름 유래는 창업자인 테리 피바디가 배우 '소피아 로렌'을 흠모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누군가는 이 와인을 마시며, 사랑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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