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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나린 | 젠더팀 기자



살면서 가장 충격받은 경험을 묻는다면, 3년 전 한 콘텐츠 스타트업의 인턴 에디터로 처음 출근하던 날을 꼽겠다. 사무실엔 종이컵 대신 텀블러가 놓여 있었고, 점심 메뉴를 주문받을 땐 비건 메뉴와 논비건 메뉴를 나눴으며, 쓰레기통마다 ‘음식물이 묻었거나 코팅된 종이는 일반쓰레기!’ ‘서류를 배출할 때는 철심을 분리해주세요’와 같은 분리수거 규칙을 상세하게 적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즐기던 내가 이곳에선 꼭 이방인 같아서 회사 텀블러를 들고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담아왔다.



모두가 친절했지만 선을 넘지 않았다. 수평적 문화를 위해 직책이나 직급 대신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는 것까진 여느 스타트업과 비슷했지만, 상사들은 퇴사하는 순간까지 내게 말을 놓지 않았다. 대학과 각종 모임에서 지겹도록 들었던 나이, 출신 대학, ‘남자친구’ 유무와 같은 신상 질문은 없었다. 남자친구나 여자친구 대신 성별을 특정하지 않는 ‘애인’이라는 좋은 호칭이 있다는 것도 팀원들을 통해 처음 알았다. 회사 복도엔 여자화장실 외에도 ‘성중립화장실’이 있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내 집에서 엄마, 아빠, 남동생과 함께 쓰는 평범한 화장실처럼 느껴졌다.



회사의 섬세함은 업무에도 담겼다. 팀원들이 오래전 만든 ‘여성용어 가이드’ 등은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콘텐츠를 만드는 기준이 됐다. 산부인과 대신 여성의학과, 저출산 대신 저출생, 낙태 대신 임신중단을 써야 하는 이유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누구나 쉽게 콘텐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제작하다’ 대신 ‘만들다’, ‘사용하다’ 대신 ‘쓰다’처럼 친구에게 설명하듯 글을 썼다. ‘섬세함 센서’가 장착되자 일상에서도 굳이 쓰지 않는 말들이 생겨났다. 어느 순간 ‘캘린더 박제’(친구와 약속 날짜를 서로 달력에 적어놓자는 의미)의 ‘박제’나 ‘식폭행’ 같은 단어가 불편해졌고, ‘반팔 티셔츠’ 대신 ‘반소매 티셔츠’라는 말을 쓰게 됐다. 기자가 하고 싶어 이 회사를 떠날 때도 꼭 학교를 졸업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겨레 젠더팀에서 일하게 된 지금, 더 나은 표현을 찾는 데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디지털 성범죄 기사에서 ‘음란물’ 대신 ‘불법 성착취물’이라고 적거나, 성범죄 피해자의 ‘피해자다움’ 대신 이들이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애썼는지 담는, 어쩌면 당연한 것들이다. 기사가 나갈 때마다 저항이 거센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다룰 땐 분량이 조금 길어지더라도 해당 법안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킨다’는 일각의 주장과 달리 고용·교육 등 특정 영역에서 혐오 표현, 차별 행위 등을 통해 고통을 줄 경우 제재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취지를 늘 함께 쓰려고 한다. 기사에 들어갈 사진을 고를 때도 피해자가 무릎을 감싸고 움츠리고 있거나, 성별 고정관념을 확산할 수 있는 사진은 제외한다. 편협한 사고를 확장해준, 말과 글의 힘이 얼마나 큰지 일깨워준 그 회사를 떠올리며 관성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다. 그리고 이 다짐을 잊고 싶지 않아 이곳에 밝혀 적는다. 누구도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기사를 오래도록 쓰고 싶다.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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