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균형이란 특정한 학문 분야에 국한된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 사학, 철학으로 대변되는 전통적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대표적 고전을 깊이 있게 공부하며 동시에 수학과 물리학, 생물학 등을 포함한 자연과학 분야에서 혁신적 발전을 이루어 낸 인물들의 저서를 탐구함으로써 학문 전 분야에 걸쳐 종합적인 균형 감각을 갖추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대학 교육을 통해 도덕적, 정서적, 인격적 차원에서 정의와 미덕을 갖춘 균형잡힌 인간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강원 춘천시가 미국 세인트존스대학의 교육 철학인 'Great Books'를 전면 도입해 고전을 중심으로 한 깊이 있는 토론 교육을 추진한다. 'Great Books(그레이트북스, 이하 GB)' 교육은 AI 시대를 맞아 인간의 사고력과 판단력을 기르는 핵심 교육 패러다임으로, 전 세계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텍스트에 근거한 사고, 타인과의 토론을 통한 의미 확장, 그리고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내는 힘은 기술 발전이 가속할수록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강원CBS는 '깊이 읽고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교육이야말로 지역과 국가의 미래 경쟁력이라는 취지에서 연말기획보도를 마련했다. 1편에서는 국내에서 가장 역동적인 GB 확산 사례로 평가받고 있는 춘천시의 사업 추진 배경과 운영 실태를 집중 조명했다. 이어지는 2편에서는 인천 남부교육지원청이 지역 교사·학생·학부모와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현장형 Great Books 실천 사례'를 통해 공교육 체계 안에서 GB가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진단했다. 마지막 3편에서는 전문가의 분석과 제언을 통해, 한국형 GB 모델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지역 간 협력과 국가 차원의 정책적 기반은 어떻게 마련되어야 하는지를 깊이있게 짚어보고자 한다.
이용화 인천대학교 교수가 세인트존슨 대학 학생들과 수업을 하고 있다. 이용화 교수 제공 |
| ▶ 글 싣는 순서 |
| ① "고전이 도시를 바꾼다, 춘천의 Great Books 대전환" ② 인천교육의 '읽걷쓰' 실험…AI 시대 학습력의 방향을 묻다 ③ 이용화 교수가 말하는 그레이트 북스란? |
GB(Great Books) 교육의 핵심 철학과 가치는?
GB 교육의 핵심 철학과 가치는 세인트존스대학의 교육 철학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이 학교의 모토인 "나는 책과 균형을 통해 아이를 자유로운 성인으로 기른다"라는 문장에 집약적으로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책은 기본적으로 인류 문명의 근간을 형성하고 발전시켜 온 고전과 명저를 통칭합니다.균형이란 특정한 학문 분야에 국한된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 사학, 철학으로 대변되는 전통적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대표적 고전을 깊이 있게 공부하며 동시에 수학과 물리학, 생물학 등을 포함한 자연과학 분야에서 혁신적 발전을 이루어 낸 인물들의 저서를 탐구함으로써 학문 전 분야에 걸쳐 종합적인 균형 감각을 갖추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대학 교육을 통해 도덕적, 정서적, 인격적 차원에서 정의와 미덕을 갖춘 균형잡힌 인간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세인트존스가 흔히 인문고전 100권을 읽고 졸업하는 대학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유클리드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 다윈, 아인스타인 등을 망라한 수학과 자연과학 분야의 대가들이 집필한 고전이 이 대학 도서목록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이러한 사상가들과 과학자들이 제기한 가설과 학설 및 주장에 대한 철학적, 논리적 고찰과 중요 실험의 재현, 철저한 검증을 통해 인간 정신의 본질과 자연과 물질에 관한 이해와 관련된 전 학문 분야를 포괄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에서 지적 능력, 감수성 및 이해력의 균형을 갖추어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규 교과과정에는 고대 희랍어와 불어 수업 등의 언어 교육 및 수학적 원리를 담고 있는 과학으로서의 음악(화성) 교육도 포함됩니다.
또한 학내의 다양한 스포츠 활동을 장려하고 있는데, 플라톤이 대화록을 통해 제시한 미래의 이상적 사회를 이끌어 나갈 인재들에게 적합한 교육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건강한 신체와 음악적 조화를 강조하며 자유학예의 근간인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 능력과 사고력을 길러주는 3학(문법, 수사학, 논증)과 관찰, 계산, 측정 및 사물의 양적, 질적 측면을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되는 4과(산술, 기하, 음악, 천문학) 분야의 종합적 교육 과정을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지덕체의 조화를 이루어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학교의 모토에서 언급된 자유는 단순히 신체의 자유나 정치적 자유를 넘어서 무지로부터의 자유, 편견으로부터의 자유, 특정 학문 분야에 예속되지 않을 자유, 즉 지적인 자유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삶에서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과 가치있는 것들에 대한 경험과 이해의 결핍으로부터의 자유까지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학생들이 스스로 문명의 정수를 담고 있는 책을 읽고 공부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과 타인의 관점을 철저히 점검하는 능력을 키우며 이성에 근거한 균형잡힌 판단을 내리고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유롭고 성숙한 인격체로 발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이 대학의 교육이 지향하는 가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용화 인천대학교 교수. 이용화 교수 제공 |
INU 센터 설립 이후 프로그램 운영 방식과 효과는?
인천대의 GB 프로그램은 대학혁신지원 사업 중 세부 과제의 하나로 파일럿 프로그램의 성격이 강했지만, 센터 설립 이후에는 대학의 도서관 내에 독립된 조직과 행정 인력을 갖춘 체계적 프로그램 운영이 가능해졌으며 전임교원 20여 명과 일부 교내외 연구교수들도 함께 참가하는 규모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문학, 어학, 윤리학, 교육학, 사회학, 물리학, 수학, 경제학 등을 전공한 교수들이 교과 및 비교과 과정을 공동으로 개발하고 운영하면서 GB 교육의 다양성이 확보되었고, 교수역량 강화 워크샵 및 교육효과 검증 연구 등도 본격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학 집행부의 행정 및 예산 지원이 강화되었고 이를 통해 교내외에서 보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추홀 도서관 등 지역의 도서관과 각급 학교와의 협업을 통해 세미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국립대학의 역할에 부합하는 사회공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2023년 말부터는 GB센터 주도로 세인트존스대학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강화해왔습니다. 현재 인천대와 세인트존스대학 간에 교수 상호파견 협약을 체결하여 2025년 2학기에 인천대 교원 한 명이 세인트존스대학에서 정규 세미나 수업을 가르치게 되었고, 세인트존스 튜터 한 명도 인천대에서 정규 교과목을 가르치는 동시에 학내외의 여러 비교과 과정도 지도하며 교수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세인트존스대학과 외국 대학 간 교수 상호파견을 통해 정규 교과과정의 수업을 진행하는 최초 사례입니다. 학생 교류프로그램도 확대 중인데, 지난 2년 간 여름 방학 동안 세인트존스대학의 재학생들이 GB 센터에서 인턴십 활동을 하며 지역 고등학교 세미나에 보조 튜터로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인천대의 교양 세미나 과목에서는 동서양의 고전과 현대의 명저 가운데 교과목의 주제와 관련된 주요 서적을 선별적으로 읽고 토의합니다. 전공 분야에서도 문학과 윤리학 등의 일부 교과목에서는 GB 교과목 3개를 이수하면 미니연계전공 과정으로 인정받아 GB 토의리더십 나노디그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독창적인 프로그램은 인천대 학산도서관에서 운영하는 <필독교양 고전읽기 세미나> 수업인데 방학 중 2주에 걸쳐 매일 하루 2시간씩 진행하는 집중 세미나 과정입니다. 학점 마일리지 적립을 통해 5회 참가 시 1학점을 부여하는 방식입니다. 학생들은 재학 중 별도의 수업료를 내지 않고 수준 높은 세미나 수업에 참가하며 최대 3학점까지 취득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대학에서 전공의 울타리를 넘나들며 세인트존스대학 방식의 교과과정을 구축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GB 비교과 과정도 개발하여 운영중입니다. 매년 1박 2일간 교수와 학생이 함께 참가하여 집중적으로 세미나와 강의를 병행한 워크샵을 진행하는 , 다양한 전공분야의 학생들이 함께 조를 구성하여 주어진 텍스트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협력하며 창의적으로 깊이있게 토의하는가를 심사하는 <비경쟁토의경연대회>, 고전과 명저를 기반으로 현대 사회의 이슈나 사회 문제 등을 연결하여 토의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프로젝트 형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등의 비교과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학생들이 책을 읽고 토의하며 자신들의 생각을 발전시켜 볼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센터 중심으로 지역 학교 및 교육기관과의 GB 협력 교육과정 운영이 더욱 확대되어, 2025년의 경우 최근 자공고로 지정된 부평의 삼산고에서 학교지정교과목으로 1학년 대상 3학점이 부여되는 교양수업 <인문학적 상상여행>을 운영하였습니다. 여건상 많은 텍스트를 다룰 수 없었음에도, 다수의 학생들이 교수들의 질문과 토의 덕분에 "인문분야의 책을 과학적 시각에서, 과학분야의 책을 인문학적 시각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고, "원래 과학 과목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인문쪽에도 관심이 생겼다" 라는 취지의 답변을 하였는데 통합적 사고 능력 신장에 GB 교육이 효과적이라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인천시 최초의 공립형 대안학교인 결마루미래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레이트북스 세미나> 과정을 진행하였고, 인천 인천인재평생교육진흥원과 함께 여름방학 영어캠프 방식으로 초등학생 대상의 고전교육기반글로벌인재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한 바 있습니다. 해당 교육과정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의 만족도와 호응이 매우 높고 교사들로부터 교육청지정 특수분야연수과정 개설에 대한 요청이 이어져 실행 방안을 마련중입니다.
이러한 체계적인 연구와 교육활동으로 인해 인천대 GB 센터와 한국의 GB 교육 프로그램이 각종 언론기관으로부터도 교육혁신의 사례로 주목받고 있으며 외부에 점점 더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타 대학과 지자체 및 교육 관련 기관에서 협업 요청과 벤치 마킹 문의도 이어지는 추세입니다.
육동한 춘천시장은 지난 7월 15일 시청 브리핑룸에서 'Great Books 프로그램' 운영 현황과 향후 추진 계획을 공개했다. 이 자리에는 미국 세인트존스대학의 Emily Langston 총장 선임고문, Nathan Shields 교수도 함께 참석해 질의응답에 참여했다. 진유정 기자 |
국내 최초로 GB를 도입한 춘천시가 갖춰야 할 요소는?
춘천 지역의 GB 교육은 인천대에서 설계한 한국형 GB 세미나 모델을 바탕으로 2022년부터 시립도서관과 지역 고등학교에서 시범 세미나를 진행하며 출범하였습니다. 이후 이 지역에서는 춘천시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 속에 초중등 교육 분야에서 독자적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보급중입니다. 2024년부터는 교육발전특구사업과 연계하여 시에서 교육도시과 주도로 상당한 규모의 예산을 투입하고 전폭적인 행정 지원을 제공하는 가운데 매우 성공적인 모델로 발전하고 있습니다.특히, 춘천시는 세인트존스대학과 및 춘천교육지원청과의 3자 교육업무협력협약 체결을 통해 GB 교육에 관한 긴밀한 협업체계를 구축하였고, 노라 뎀라이트너(Nora Demleitner) (전) 총장이 2024년 5월 춘천시를 방문하였을 때, 시립도서관에서 지역의 학생, 시민, 교사 등을 대상으로 교육설명회와 시범세미나를 개최하여 지역 사회와 교육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역 사회 전반에 GB 교육을 도입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육동한 춘천시장 또한 2025년 6월 미국 매릴랜드 주에 위치한 세인트존스대학 아나폴리스 캠퍼스를 방문하여 교육협력 고도화 방안을 논의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림대와 강원대에서 GB 교육 확산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지역 대학 교수들과 이 두 대학과 협업 관계에 있는 인천대 GB 센터 교수들의 참가가 상당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지자체 차원의 관심과 예산지원 속에 세인트존스대학이 외부 대학들과 GB 교육관련 협업을 진행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유례가 없었던 일로서 이 대학 측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협업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2025년도에는 춘천 지역 4개의 초등학교, 2개의 중학교 및 5개의 고등학교에서 GB 세미나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세인트존스대학의 튜터 3명과 학생 7명을 7월 한 달 간 초청하여 한림대와 지역 학교에서 초중고 학생들 및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운영한 춘천 여름 GB 캠프는 한국 GB 교육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4주간 진행된 이 캠프에는 다양한 연령의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하였고, 지역 대학 교수들과 세인트존스의 한국인 재학생들이 공동 튜터로 진행한 한국어 세미나 외에도 세인트존스대학 튜터들과 한국 교수들이 영어로 세미나를 진행하여 이 지역의 학생들이 고전명저를 직접 읽고 토의하는 가운데 영어 실력을 향상시킬 기회도 제공하였습니다.
이번 GB 캠프 기간에는 각급 학교 교사들도 세미나 수업을 직접 참관하였고, 이후 튜터 양성과정에도 참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변의 확대가 지역의 고전 기반 독서 및 토의 교육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직접적인 교육적 효과와 함께 세계 수준의 대학 교수들과 학생들이 1개월 간 체류하며 지역 사회에 새로운 지적 자극을 주었고 밀도 높은 상호 교류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글로벌 문화 형성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 프로그램을 매년 확대 운영해 나간다면, 대학과 지역 사회 구성원들이 주축이 된 수준 높은 지적 공동체를 구축해 나가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춘천시에서 추진 예정인 '시민학습·청소년·공공형 GB 프로그램'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적 자원(튜터)을 확보하여 이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울러 지속적 예산 확대 및 교육청 차원의 체계적 행정 지원 역시 중요합니다. 최근 춘천시와 한림대의 협의를 통해 한림대 도서관 내에 한림 GB 교육센터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GB 교육의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다양한 학문 분야의 텍스트를 다루는 세미나를 진행한 경험이 풍부한 교수진이 그다지 많지 않아 본격적인 확산이 쉽지 않습니다. 교수진 확보와 더불어 이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진 각급 학교의 교사들을 양성하는 문제 역시 시급합니다. GB 교육에 관심을 가진 지역 교사들을 대상으로 작년 말부터 설명회와 시범 세미나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금년도에는 저와 한림대의 한경민 교수가 중심이 되어 본격적으로 GB 교사 튜터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중인데 15명 가량의 지역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꾸준히 참가하고 있습니다.
상반기 하반기에 각 8차시를 진행하였고, 한림대 주도의 강원 라이즈 평생교육 클러스터 조성 사업을 통해 4명의 교사를 선발하여 내년 1월 초에 세인트존스대학에서 10일간의 현지 단기 현지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며 향후에도 추가로 교사 대상의 연수과정을 개발하여 운영할 계획입니다. 이러한 교사들의 자발적 움직임에 호응하여 교육청이 주도하여 GB 교육 프로그램 교사 연수제도를 운영하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교수-교사 공동 연구 모임을 지원하고 고전명저 기반의 다양한 교과-비교과 과정을 개발하여 시범 운영과정을 거쳐 춘천형 GB, 더 나아가 강원형 혹은 한국형 GB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입시 일변도의 교육 과정에 의미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입식 교육을 극복할 대안으로 혁신학교나 IB 프로그램이 거론되고 있긴 하지만 교과과정 재설계, 평가제도를 포함한 인증과정과 비용은 물론 입시제도 등을 포함한 모든 교육체계를 한꺼번에 통째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는 현실을 고려할 때, 교사들의 자율적 선택과 판단에 따라 기존의 교과목과 교과과정에 적합한 내용과 요소를 필요한 수준으로 도입할 수 있는 한국형 GB 교육모델을 보급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대학과 지자체, 그리고 교육청이 긴밀한 협업을 진행해야 합니다. 우선은 일반 대학의 대학원에 GB 프로그램 석사과정을 설치하거나 협동과정을 운영한다면 국내 공공형 GB 프로그램의 본격적 확산에 중요한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별도의 예산 확보를 통해 새로운 대학원 대학교를 설립하여 교사와 일반인들을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세인트존스대학에서도 초중등교육 분야의 교사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1967년도에 대학원 석사과정을 설치했습니다. 현재는 교사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 혹은 박사학위를 받기 전에 정전을 공부해 두고자 하는 대학원생들이 많이 지원하지만 최초의 목적은 교사 양성이 대학원 설치 목적이었습니다. GB 프로그램 도입과 지역 사회 확산을 위해 우리가 참고할 만한 내용입니다.
현재 세인트존스대학과 협의를 통해 한국 GB 튜터 자격증 과정 개설을 추진중입니다. 교사 튜터 양성 프로그램에 참가중인 춘천 지역 교사들은 지적 수준과 역량이 상당히 높고 열정과 의지도 충분합니다. 이 분들은 GB 세미나 수업 진행 방식을 익혀서 튜터 자격증을 취득한 다음 본인들이 가르치는 학생들만이 아니라 평생교육원, 각급 도서관 등을 통해 성인학습자를 대상으로 한 독서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다양한 차원의 GB 세미나를 진행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민학습·청소년·공공형 GB 프로그램'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교사들의 역할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행정 및 예산 지원이 필수적입니다.
당장은 튜터자격증 과정을 운영하는 것이 현실적 방안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대학원 과정을 설립하여 건강하고 수준높은 교육공동체를 조성하고자 하는 의지와 역량을 갖춘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교육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춘천시가 지난 8월 추진한 '글로벌 인재양성 Great Books 여름 캠프'. 춘천시 제공 |
한국형 Great Books의 확장 가능성은?
한국에서 최초로 GB 교육을 시작하고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인천 지역이나 춘천 지역에서 대학이 주도하고 지자체와 교육청이 지원하는 구도에서 우수한 교사 튜터 양성과 교과 과정 및 교재 개발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다른 대학과 지역에서도 도입할 수 있는 한국형 GB 프로그램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무한경쟁을 기반으로 한 입시와 취업 준비 일변도의 교육 과정과 방법에 대한 현실적이고 수준 높은 대안으로서의 GB 교육 모델을 공교육 체계 내에서 제시하고 청소년들과 시민들에게 보급한다면 사교육을 줄이고 지적인 사고 능력을 바탕으로 균형 감각을 갖춘 책임있는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의와 협업을 바탕으로 한 세미나를 통해 경쟁과 진영논리로 치우친 사회적 갈등 양상 해결과 협의 문화 형성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 과정에서도 자칫 시류에 흔들리거나 실용적 단기 성과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경우, 교육의 본질이 손상되고 그 내용과 방향이 왜곡되기 십상입니다. 세인트존스대학이 추구해 온 바와 같이 이상적 교육 철학과 철저한 교육과정을 수립한 후 지속적으로 붙들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뉴욕타임즈에서는 세인트존스대학을 미국 대학 중 가장 남들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대학(the most contrarian college)으로 규정하며, 의도적으로 남다른 방식의 고전 교육을 통해 미래를 잘 준비하는 성공적인 학교로 규정했습니다. 경제전문지 쿼츠(Quartz)에서도 이 대학이 미국에서 가장 미래지향적 사고를 하는 대학, 미래에 가장 잘 준비된 대학(the most forward-thinking, most future-proof college in America)라고 평가했습니다. 지금은 다소 변형되었지만 세인트존스대학과 비슷한 시기에 콜럼비아 대학과 더불어 코어 프로그램을 도입한 시카고 대학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대학으로 유명합니다. 이 대학의 학문적 성공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코어 프로그램이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것이 순수 학문, 기초 학문의 토대를 이루는 리버럴 아츠 교육의 힘입니다.
이러한 교육 기관에 미국 기업과 재력가들은 상당한 관심을 보여왔고 엄청난 기부금을 지원해왔습니다. 지난 몇 년간 세인트존스대학이 등록금을 낮출 목적으로 진행한 캠페인(Freeing Minds Campaign)의 경우, 약정기부금을 합쳐 3억 달러가 모금되었습니다. 아나폴리스와 싼타페 두 곳에 있는 캠퍼스를 합친 학부생 수가 800명 정도에 불과한 소규모 리버럴 아츠 대학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실로 놀라운 액수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여러 대기업에서 장학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교육관련 재단설립과 기부금 운영이 지나치게 특정 대학, 특정 학문 분야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편향되어 있다고 봅니다. 우리 나라도 이제 경제 규모와 문화적 역량이 충분히 성숙한 단계에 접어든 만큼 세인트존스대학과 같은 Great Books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며 제대로 된 지식인을 길러내는 대학이 적어도 한 곳 정도는 필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2015년 말 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타리 <명견만리>에서 최재천 교수가 단편적 지식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는 상황에서 미래를 대비할 이상적인 대학의 모델이자 학생들에게 생각의 터전을 제공하는 대학으로 세인트존스대학을 소개하여 국내에 적지 않은 방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학 전체가 취업기관으로 전락한 대학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사회가 함께 하면 우리도 제대로 된 교육의 방향을 정립할 수 있다고 역설한 바 있지만, 10년이 지난 현재, 대학 차원에서 이와 유사한 방식의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기 위해 노력한 곳은 인천대 한 곳 뿐이고 이마저도 체계적인 학부나 단과대학 수준의 교과과정과는 아직 거리가 있습니다.
이런 대학이 하나의 이상적 교육 모델로 자리잡고 다른 교육 기관과 지역공동체에 인적자원과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게 되면 우리 사회 전체의 교육 문화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뿐만이 아니라 교육부와 국회, 지자체, 그리고 기업 등에서 세인트존스대학 교육 모델에 관심을 가지고 장기적 관점에서 지원과 투자를 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자율전공학부를 활용해서 4년간 리버럴 아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과정을 개설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종합 대학 내에 하나의 대학(a college within a college) 개념으로 설립할 수도 있습니다. 학석사 연계과정으로 리버럴 아츠 교과 과정에 더해 대학 내의 석사과정 중 관심있는 분야를 택해 2년간 공부한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복수 전공자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 기초 학문 역량을 바탕으로 전공 영역으로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모델입니다.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이 통합된 교육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정확히는 개별 전공 중심으로 분리, 영역별 세분화, 전문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소실된 기초학문 체계를 복원하고 철처한 읽기, 토의, 실험, 증명 방식의 고전 공부를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을 실시하자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서양의 고전뿐만 아니라 동양의 고전과 한국의 고전과 명저까지도 교과과정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학원 협동 과정을 설치하고 세인트존스대학과 협업으로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Great Books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공동학위제도를 운영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교육의 미래에 무궁무진한 기회와 가능성이 열려있습니다. 다만 어느 대학이 먼저, 누가 먼저, 어떻게 시도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2025년 GB프로그램 학교 과정 운영 사진. 춘천시 제공 |
GB 프로그램이 대한민국 교육에 남길 유산은?
대한민국 교육에 남길 유산이란 표현은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좀 거창해 보입니다. 다만 GB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고전명저 중심의 토의식 교육이 제대로 시행된다면 물질과 효용, 기술발전만을 절대시하는 가운데 우리가 망각해 가고 있는 인간중심의 교육을 다시 한번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성적, 입시, 자격증, 취업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의 내용과 방식에 대한 분명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은 모든 것이 수치로 평가되는 상황에서 경쟁논리와 효율지상주의를 바탕으로 얄팍한 방식으로 점수를 따기 위해 암기 위주의 공부를 하는 대신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공부 그 자체의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교과서나 강의, 유튜브 및 각종 동영상을 통해 다른 사람이 정리해 준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모두 동일한 글을 각자 읽고 깊이 고민한 다음 서로의 질문과 의견을 주고 받으며 논리적으로 따져보는 과정에서 이 방식을 통해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즐겁게, 훨씬 더 많이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미나 수업을 통해 형성된 질문과 성찰에 바탕을 둔 사유의 습관은 개인의 일생이나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그 어떤 물질적 성취나 안락에 견줄 수 없는 이익과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지난 여름 GB 세미나에 참가했던 학생들 가운데에는, "토론이라 하면 무겁고 딱딱한 이야기이고 재미없고 지루한 언쟁이라는 고정관념을 부셔주는 수업이었고 지적인 수업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아 다른 학생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라는 고등학생도 있고, 이런 "GB 토의 수업은 일주일에 3회 정도 평생 동안 참가하면서 살아가고 싶다"는 중학생도 있습니다.
이와 함께 GB 프로그램은 인공지능 시대에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는 사유의 힘을 기르는 교육 풍토 조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과 튜터들이 함께 토의하는 과정은 냉철한 질문, 투철한 성찰, 엄밀한 논증 과정을 통해 참가자 각자 자신의 무지, 편견, 논리적 오류 및 사유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하게 도와줍니다.
또한 이러한 과정은 글을 꼼꼼하게 읽어나가는 능력과 깊이 있고 좋은 질문을 올바르게 제기할 수 있는 능력도 길러줍니다. 사유 능력과 질문 제기 능력이 인공지능 시대에 특히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강조합니다. 그러나 정작 학생들이 책을 읽고 토의하며 기본 지식과 사고 능력을 충분히 키우지 못한 상태에서 사고의 전 과정을 인공지능에게 내맡겨버린다면 머지 않아 인공지능이 제시한 답변의 오류와 한계마저 분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결국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독서와 토의에 기반하여 사고력을 길러주는 GB 교육을 통해 이러한 상황을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갈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GB 프로그램은 정규 학교 과정 만이 아니라 평생교육 과정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현직 교사분들도 이 교육 방식을 배운 후, 도서관이나 주민자치센터 등을 통해 성인 대상을 세미나를 열고 다양한 세대의 학습자들이 함께 공부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GB 프로그램이 우리 사회에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 변화는 이러한 교육이 지닌 가치를 공유하고 그 내용과 방법을 확산해 나감으로써 이를 통해 구성원들 모두가 더 나은 삶, 더 깊이 있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용화 교수. 인천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영문학 박사, 세인트존스대학 석사 취득. INU Great Books 프로그램 개발 주도, 세인트존스대학 한국교육협력고문, 춘천시 교육자문. 2025년 2학기 세인트존스대학 아나폴리스캠퍼스 1학년 세미나수업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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