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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공주 출신 어머니, 실험적 글쓰기로 되살려내다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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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기지촌이 있었던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의 옛 성병관리소 건물. ‘유령 연구’ 한국어판 표지에는 이 건물 사진이 쓰였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미군 기지촌이 있었던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의 옛 성병관리소 건물. ‘유령 연구’ 한국어판 표지에는 이 건물 사진이 쓰였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한국계 미국 사회학자 그레이스 엠(M.) 조(뉴욕시립대 교수)는 2023년에 번역 출간된 회고록 ‘전쟁 같은 맛’(원저는 2021년작)으로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새롭게 번역돼 나온 ‘유령 연구’는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엮은 그의 2008년 첫 책이다.



두 책은 지은이의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자매적 관계를 지닌다. ‘전쟁 같은 맛’이 음식에 얽힌 기억을 매개로 삼아 기지촌 성 노동자 출신인 어머니의 삶을 돌이켰다면, ‘유령 연구’는 지은이에게 어머니라는 존재가 유령처럼 인식되었던 경험에서 출발해 미국으로 결혼 이주한 기지촌 출신 여성들의 삶을 복원하고 복권시키려는 시도로 읽힌다. “난 분유가 너무 싫어. 그 맛이 전쟁을 생각나게 해”라는, 책의 중간쯤에 인용된 어머니의 말은 두 책의 친연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머니가 말없이 저녁을 먹는 가족들 속에서 왜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는지 완전히 살을 붙여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어.”



부산의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던 중 미국 상선 선원이었던 아버지와 결혼해 1970년대 초 미국으로 이주한 어머니는 자신의 과거에 관한 질문에는 한사코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에게는 유년기부터의 사진과 추억이 있었지만 어머니의 그것들은 공백이었고 그런 점에서 유령을 떠오르게 했다. 지은이가 십대 중반이었을 무렵 어머니가 앓은 조현병과 그로 인한 환청과 환각은 ‘유령스러움’을 더했다. 기지촌 여성들을 가리키는 ‘양공주’라는 말을 지은이가 처음 접한 것은 1998년이었지만, 어머니의 과거에 관해 그가 알게 된 것은 그보다 몇년 전이었다. ‘유령 연구’는 어머니의 감춰진 과거에 대한 개인적 궁금증과 함께 기지촌 출신 결혼 이주 여성들을 침묵과 은폐 속에서 구해 내고자 하는 학자적 열정의 결과물이다.



6·25전쟁 당시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가 부상을 당한 채 미군의 부축을 받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NARA) 소장. ‘유령 연구’의 원서 표지에 쓰인 사진이다. 동녘 제공

6·25전쟁 당시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가 부상을 당한 채 미군의 부축을 받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NARA) 소장. ‘유령 연구’의 원서 표지에 쓰인 사진이다. 동녘 제공


미군을 상대로 성 노동을 한 한국 여성은 100만여명,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주한 여성은 10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 한인 사회의 중추를 이루는 이들에 관해서는 그러나 정확한 정보와 평가가 나와 있지 않다. 당사자들과 그 가족들이 양공주 출신이라는 과거를 감추려 하기 때문이다. 이 책 원저의 부제 ‘수치와 비밀 그리고 잊힌 전쟁’이 양공주 출신 결혼 이주 여성들의 기원과 맥락을 알게 한다면, 큰 제목 ‘한인 디아스포라를 배회하는’은 미국 한인 디아스포라 사회를 감싸고 있는 이 여성들의 유령 같은 존재감을 가리킨다.



유령 연구. 그레이스 M. 조 지음, 성원 옮김, 김은주 해제, 동녘, 2만5000원

유령 연구. 그레이스 M. 조 지음, 성원 옮김, 김은주 해제, 동녘, 2만5000원


객관적 정보가 빈약한 만큼 이 여성들에 관해서는 “조리 있는 서사를 구성할 수 없는 상태”였다. 유령 같은 존재를 포착하자면 그에 걸맞은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 법. 불확실성, 무의식, 판타지, 픽션, 공연, 전시 등을 활용하는 다른 방식의 글쓰기가 그렇게 해서 시도됐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친숙한 형태의 사회과학 텍스트와는 거리가 멀다.” 지은이는 양공주가 본격적으로 출현하게 된 6·25전쟁에 관한 기존 기록들의 비어 있는 틈을 소설과 영화 같은 허구적 서사들로 메꾸고, 여러 결혼 이주 여성들의 증언을 조립하고 재구성하며, 어머니의 환각과 환청 그리고 지은이 자신의 꿈 같은 무의식적 텍스트 역시 연구 대상으로 삼아 양공주 출신 결혼 이주 여성의 온전한 모습을 되살리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특히 눈에 뜨이는 시도는 지은이가 ‘자문화기술지’(autoethnography)라 부르는 방법론이다. 앞에서 인용한 저녁 식탁 장면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지은이 자신이 일인칭 화자로 등장해 현실과 허구를 뒤섞어 서술하는 이 단편적·삽화적 텍스트들은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삽입되어 책의 본문과 충돌하는 동시에 그것을 보완한다. 이런 실험적 글쓰기 덕분에 이 책은 사회과학 논문에 문화비평 또는 문학적 글쓰기가 결합된 독특한 장르적 특성을 지닌다.



지난해 10월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옛 성병관리소에서 동두천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주최로 철거에 반대하는 문화제가 열려 참가자들이 건물 들머리에서 ‘평화의꽃’을 꽂고 있다. ‘유령 연구’의 지은이 그레이스 조는 공대위의 천막 농성장에 두번 방문했다고 한국어판 서문에 썼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지난해 10월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옛 성병관리소에서 동두천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주최로 철거에 반대하는 문화제가 열려 참가자들이 건물 들머리에서 ‘평화의꽃’을 꽂고 있다. ‘유령 연구’의 지은이 그레이스 조는 공대위의 천막 농성장에 두번 방문했다고 한국어판 서문에 썼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한인 디아스포라에는 우리가 앎을 허락받지 못한 것의 트라우마 효과가 배회한다.”



미국 내 한인 사회는 아시아계를 통틀어서도 가장 동화가 잘 된 ‘모범 소수 인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런 매끄러운 외피 아래에는 누구도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는 슬픔과 고통이 한이 되어 흐른다. 그 한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쟁 당시 한반도 전역을 상대로 저질러진 “미국 주도의 가차 없는 폭력”이 있다는 것, 상황에 따라 ‘민간 외교관’으로 떠받들리거나 민족의 수치로 폄하되다가는 “체제 저항적인 민족주의 순교자”(미군에게 살해당한 이들)로 표상되기도 하는 양공주들에게 온당한 자리를 찾아 주어야 그 한이 해소될 것이라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책 출간을 불과 몇달 남겨두지 않고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이 책을 헌정하며 그는 이렇게 쓴다. “엄마, 난 어머니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수치스럽지 않아요. 엄마는 인정받아 마땅해요.”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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