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뉴스
서울
맑음 / -3.9 °
중앙일보 언론사 이미지

"쓰레기통서 장미 피운다" 나락 빠진 韓…조롱 이겨낸 기적 그후엔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

중앙일보 박정호.권혁주.고성표
원문보기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 연재를 마치며



광복

광복



평균수명은 44세였다. 1세 이하 영아사망률은 1000명당 102.4명, 인도에 이어 세계 2위였다. 13세 이상의 77%는 까막눈이었고, 일곱 중 하나(15%)는 실업자였다. 취업자의 80%는 농림어업에 종사했다. 그나마 농업인의 3분의 2(67.2%)는 소작농이었다. 수출품의 40%가 말린 오징어였다(『통계로 보는 광복 전후의 경제·사회상』, 옛 통계청).

1945년 해방 직후 우리의 자화상이다. 가진 게 없으니 거둘 세금이 있으랴. 국가재정에서 조세 수입의 비중은 15%에 그쳤다. 남한의 전력 자급률은 32%, 나머지는 북한이 보내줬다. 주권이 없던 미군정 시절, 정치는 극도로 어지러웠다. 45년 9월부터 47년 4월까지 테러만 311건이 일어났다. 28명이 숨지고 731명이 다쳤다.

곧바로 전쟁이 터졌다. 나라 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세계 최빈국이 됐다. 폐허가 된 서울을 돌아본 맥아더 장군은 “이 나라가 다시 일어서려면 적어도 100년은 걸릴 것”이라고 비관했다. 미국 측은 “원조금으로 공장을 짓기보다 필요한 소비재를 일본에서 사라”고 권했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51년 10월 1일 자에 이렇게 적었다. “폐허가 된 한국에서 건강한 민주주의가 싹트기를 바라느니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게 더 합리적이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경부고속도로 개통


암울한 전망은 60~80년대까지 이어졌다. 60년대 후반 한국이 종합제철소를 세우겠다고 했을 때, 세계은행 자문역인 존 자피 박사는 더 타임스 기사를 재인용했다. “한국이 종합제철소를 짓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피우려는 것과 같다.” 80년대 초반 미국·일본이 양분했던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했을 땐 비웃음만 돌아왔다.

민주화운동

민주화운동


하지만 대한민국은 기적처럼 솟아올랐다. 미국 시사매체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는 2025년 경제·외교·문화·국방력 등을 종합한 한국의 국력을 미국·중국·러시아·영국·독일에 이어 6위로 꼽았다. 프랑스(7위), 일본(8위)보다 앞섰다. 상전벽해 그 자체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한국의 성취는 혁명적이었다. 전쟁이 끝났던 53년 477억원이던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2560조원으로 약 70년 새 5만3600배가 됐다. 80년대 무르익은 시민의식은 군사정권을 무릎 꿇리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꽃피웠다. 요즘 한국의 반도체는 21세기 인공지능(AI) 시대를 떠받치고 있다. 6·25 당시 전차 한 대 없던 우리는 세계 5위의 군사 강국으로 성장했고, 미국 트럼프 정부는 조선업 부활의 파트너로 한국에 손을 벌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문화파워다. 올해 미국 핼러윈 축제는 ‘K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캐릭터로 가득 찼다. 블랙프라이데이에 아마존 쇼핑몰 뷰티 상품 판매 1~3위는 모두 한국 브랜드였다. BTS를 뒤이은 아이돌 그룹 스트레이키즈는 올해에만 빌보드 차트 1위에 8개 앨범을 올렸다. 미국에선 이런 만담까지 나왔다. “알파벳 K를 한국인이 가져갔어. K팝, K드라마, K바비큐…. 쩔잖아(incredible)! 백인 우월주의가 무너지고 있지. 이제 곧 ‘KKK’도 ‘코리안 코리안 코리안’이 될 거야.”(코미디언 앤드루 오롤포)


월드컵

월드컵


중앙일보가 광복 80년, 창간 60년을 맞아 ‘대한민국을 만든 트리거 60’ 시리즈를 기획한 배경이다. 오늘날 한국의 성취와 과제를 두루 조망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비롯해 농지개혁, 한·미동맹, 포니와 반도체 신화, 의무교육 실시, 서울올림픽과 2002 월드컵 등 수많은 결정적 계기(트리거)를 짚어봤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나라 중 유일하게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 ‘기적’이란 두 글자에 담기에는 너무나 많은 고비와 위기를 겪으며 달려왔다. 그 밑에 깔린 핵심 동인은 무엇일까.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 회장의 회고록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한강의 기적’ 속에 ‘기적’은 없다. 다만 성실하고 지혜로운 노동이 있을 뿐이다.”

UAE 원전

UAE 원전


한국인은 미친 듯이 일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 근로시간이 가장 길었고, 수면시간은 가장 짧았다. 달러를 벌려고 서독의 탄광, 베트남의 정글, 중동의 사막을 가리지 않았다.

2025년의 우리를 형성한 토대는 역설적으로 한국전쟁이다. 전화(戰禍)로 무너진 신분·계층사회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열망과 절대빈곤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작동했다. 뜨거웠던 교육열이 에너지를 제공했다. 고려대 허태균(심리학부) 교수는 『어쩌다 한국인』에서 이렇게 진단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며 우리에게 남은 것은 생존의 욕구, 가난에 대한 두려움,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욕망이었다. ‘지금 나 무시하느냐’는 한국인의 자존심에 자기가 속한 집단을 가족처럼 여기는 가족 확장성이 더해졌다. 온 국민이 가족같이 똘똘 뭉쳐 잘살아 보겠다는 목표를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질적 풍요와 그것을 가져다줄 기술과 산업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특유의 교육열은 노동의 효율성을 끌어올렸다. 포화 속에서도 학교는 멈추지 않았다. ‘잘살아보세’ 구호의 실체는 내 자식 잘 가르쳐 ‘나보다 더 잘살게 하기’였다. 60~70년대 산업화는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십을 뒷받침한 양질의 노동력 덕분이었다.

6·25는 최대의 비극이었다. 다시는 전쟁을 겪지 않기 위해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워야 했다. 선택은 미국이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주도한 미국과의 동맹체제가 격변의 동북아를 헤쳐가는 나침반 역할을 했다 “아시아 국가는 스스로 안보를 책임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1969)’과 주한미군 일부 철수는 더 강한 자극제가 됐다.

‘기생충’ 봉준호 감독(오른쪽)

‘기생충’ 봉준호 감독(오른쪽)


대한민국의 또 다른 키워드는 개방이다. 80년대 후반 중진국 대열에, 이후 선진국에 올라선 동력은 ‘밀실’에서 ‘광장’으로의 탈주였다. 눈앞의 위기를 개방과 경쟁이란 맞수로 넘어섰다. 일본대중문화 개방(1998년)과 스크린쿼터 축소(2006년)로 가요·드라마·영화가 세계와 통하는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K팝과 ‘기생충’ ‘오징어 게임’이 탄생한 배경이다. 한국 현대사의 고단한 여정과 놀라운 반전 그대로다. 세상이 넓어지니 할 일이 많았다.

싸이

싸이


케데헌

케데헌


경제도 마찬가지였다. 지지층의 반대 속에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한 노무현 대통령은 “개방하지 않고 발전하는 나라는 없다”고 믿었다(『대통령의 경제학』, 이장규). 6·25 이후 최대 분수령인 87년 민주화 체제도 성장한 경제와 성숙한 시민의식이 만난 결과였다. 한국인을 세계의 골방에서 한복판으로 옮겨놓은 ‘트리거 중의 트리거’쯤 된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시대가 바뀌었고, 세계가 달라졌다. 기존의 성공 방식은 한계에 직면했다. 현재 한국의 중추는 결핍 세대가 아니다. 반면에 양극화에 따른 상대적 결핍감은 한층 깊어졌다. 우리가 보고 베낄, 선진국이라는 정답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새 목표를 세우고 새 길을 닦아야 한다. ‘퍼스트 무버(First Mover)’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


한국의 기초체력은 지금 그로기 상태다. 잠재성장률이 2% 아래로 떨어졌다. 각종 규제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노동 유연성 개선도 말뿐이다. 세계 최고 속도의 저출생·고령화 추세도 암울하다. 이에 반도체 신화를 일궈낸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이 일갈했다. “한국은 성공의 저주에 갇혔다”라고. 우리가 인류사에 남을 기적을 이뤘지만, 현재에 안주하는 기득권을 낳았고, 정치·경제 제도가 세계적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025년의 한국은 정치·경제·사회 모두 ‘퍼펙트 스톰’에 갇혀 있다. 격화하는 보호무역체제를 뚫어갈 전략이 절실하다. 한데 국가의 최상위 기제인 정치는 여전히 진영 대결에서 헤매고 있다. 소년범 전력의 연예인 은퇴를 둘러싸고 진보·보수가 물어뜯는 촌극마저 벌어졌다.

얽히고설킨 현안을 풀어갈 쾌도난마는 없다. 다만 더는 분열과 갈등이 없어야 한다. 80년 전 “친일파는 많을수록 좋다. 반민족적 친일파를 처단하라는 것이지, 언제 단순히 친일파를 처단하고 했느냐”고 호소한 백범의 통합 정신을 경청할 때다. 그 출발점으로 ‘트리거 시리즈’ 마지막 60회에서 제안한 개헌을 다시금 꺼낸다. 2026년 대한민국의 새로운 시작을 소망한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issue/11765



박정호·권혁주·고성표 기자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nfo icon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AI 이슈 트렌드

실시간
  1. 1오타니 WBC 출전
    오타니 WBC 출전
  2. 2통일교 신천지 특검
    통일교 신천지 특검
  3. 3김영대 추모
    김영대 추모
  4. 4우수의정대상 수상
    우수의정대상 수상
  5. 5젤렌스키 트럼프 회담
    젤렌스키 트럼프 회담

중앙일보 하이라이트

파워링크

광고
링크등록

당신만의 뉴스 Pick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