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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8년 임기 중 가장 힘든 결정은 한국전 미군 파병”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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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72년 12월 26일 88세
트루먼 미 대통령.

트루먼 미 대통령.


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1884~1972)은 1945년 4월 12일 취임했다. 전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4선 연임 82일 만에 사망해 부통령에서 직을 승계했다. 1948년 재선에 성공해 1953년 1월 20일까지 재임했다.

트루먼 재임 시기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해방, 정부 수립, 6·25전쟁이 트루먼 임기 중 일어났다. 취임 넉 달 후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결단으로 한국은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 발발 직후 미군 파병 결정으로 침략군을 격퇴했다. 소련에 대항해 한국을 비롯한 자유 세계를 지키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트루먼은 북한군이 전격 남침한 1950년 6월 25일 고향인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주말 여행’ 중이었다. 전쟁 발발 보고를 받고 급히 워싱턴으로 돌아와 성명을 발표했다.

트루먼, 한국전쟁 포기 안 한다. 1952년 1월 11일자 1면.

트루먼, 한국전쟁 포기 안 한다. 1952년 1월 11일자 1면.


“트루만 미 대통령은 26일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하여 감행된 중대한 평화 파괴 행위를 종지(終止)시키려는 노력에 있어서 유엔을 강력히 지지하겠다’고 언약하였다.”

트루먼은 “이 침략 행위의 책임자들은 미국 정부가 세계 평화에 대한 이러한 위협을 극히 중대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며 “미국은 적화(赤化)를 방지하고 반공 통일에 필요한 무기를 시급히 공급할 것” “북한 괴뢰집단의 불법 침해를 방지하고 그들의 야망을 분쇄하기 위하여 적극 공세를 취할 것”(1950년 6월 28일자 1면)을 천명했다.

트루먼은 훗날 8년 임기 중 가장 힘들었던 결정으로 6·25 전쟁에 미군을 파병한 일을 꼽았다.


“트루만 전 미 대통령은CBS테레비죤 방송회견에서 자기가 팔년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결정은 한국 전란때 미군을 파견하는 문제였다고 말하였다. 트루만씨는 자기는 ‘뮤니히(뮌헨) 협정과 국제연맹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미군의 한국 파견을 명령하였다고 말하였다.”(1958년 2월 5일자 1면)

한국에 미군 파병, 8년 집권 중 가장 힘들었던 결정. 1958년 2월 5일자 1면.

한국에 미군 파병, 8년 집권 중 가장 힘들었던 결정. 1958년 2월 5일자 1면.


이승만은 미군을 파병해 한국을 구한 트루먼에게 큰 고마움을 가졌다. 1954년 미국 방문에서 전직 대통령 트루먼의 고향 집을 일부러 찾아가 고마움을 전했다.

“미국을 방문 중에 있는 이 대통령은 5일 전 미국 대통령 해리·S·트루맨씨에게 한국 인민들은 중공군과의 전투를 도웁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여준 귀하에게 끊임없이 감사할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이 대통령은 전 미국 대통령 트루맨씨를 인디펜덴스의 사저(私邸)로 방문하였다.


1954년 8월 7일자 1면. 이승만, 트루먼 사저 방문.

1954년 8월 7일자 1면. 이승만, 트루먼 사저 방문.

트루맨 부처(夫妻)는 이 대통령 부처를 현관에 영접하였다. 트루맨씨가 “귀하를 맞이하게 되어 실로 기쁩니다”라고 말하니 이 대통령은 “감사합니다. 내가 여기에 와서 우리에게 군대를 파견한 귀하의 위대한 결정에 대하여 끊임없는 사의(謝意)를 표명할 기회를 갖게 됨을 기뻐마지 않는 바입니다”라고 응수하였다. 이 대통령은 트루맨씨의 군대 파견이 한국민의 정신을 강화시키었고 한국민으로 하여금 공산군에 대항할 수 있게 하였다고 언명하였다.”(1954년 8월 8일 자 1면)

트루먼은 6·25전쟁 때 자신과 갈등을 빚은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해임했다. 훗날 트루먼은 “맥아더 장군이 중공과 동부 소련령에 대하여 원자폭탄 사용을 원하였다”(1960년 12월 23일 자 1면)고 공개했다.

맥아더는 즉각 부인했다.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는 22일 밤 자기가 한국전쟁 당시 원자탄을 사용하자고 미국 정부에 요청하였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허위라고 말하였다. (중략) 맥아더 원수가 발표한 성명서는 “내가 명령에 불복종하였다는 것은 전혀 사실과 어긋나며 한국전쟁을 승리로 종착하지 못함으로써 자유세계는 일대 재해(災害)를 당하였다”고 주장하였다.”(1960년 12월 24일 자 1면)

트루먼 서거. 1972년 12월 27일자 1면.

트루먼 서거. 1972년 12월 27일자 1면.


트루먼은 1972년 12월 26일 88세로 별세했다. 부고 소식이 전해진 27일 유신헌법 발효로 임기 6년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고인은 우리 한국 국민으로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은인”이라고 애도했다.

“박 대통령은 특별담화문을 발표, “우리 국민들은 비극적인 6·25 전란 동안 그가 우리에게 보내준 무한한 격려와 지원을 항시 잊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의 서거를 남달리 슬퍼하고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면서 그의 용기있는 결단으로서 맺어진 두 나라의 혈맹의 우의는 영원히 계속될 것을 믿어마지 않는다고 말했다.”(1972년 12월 27일 자 1면)

2025년 6월 30일자 A27면.

2025년 6월 30일자 A27면.


2025년 6월 트루먼의 손자 클리프턴 트루먼 대니얼(68)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의 희생으로 지켜낸 대한민국의 오늘을 할아버지가 보셨다면 깊이 감격했을 것”이라고 했다. 트루먼의 외동딸 마거릿의 장남인 대니얼은 용산 전쟁기념관에 들어선 ‘이승만·트루먼 전시실’과 경북 칠곡 다부동 전적지에 선 이승만·트루먼 동상을 둘러봤다.

“할아버지는 역대 최저 지지율로 퇴임한 대통령인데, 가장 큰 이유가 6·25전쟁 파병이었다. 따라서 내 유년 시절 ‘트루먼의 손자’라는 사실은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웃음). 퇴임 후 20년이 지나면서 할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더라. 한 록 밴드가 1973년 ‘해리 트루먼’이란 싱글 앨범을 내고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이 필요해’라고 노래했을 만큼! 지금은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10명 중 한 분으로 꼽힌다. 한국에서도 할아버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같아 기쁘다.”(2025년 6월 30일 자 A27면)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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