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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인의 근대일본산책] 우월성 비추던 열등한 거울, 아시아가 추격하자 정체성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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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이기를 거부해 온 일본의 딜레마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누군가로부터 “일본은 아시아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치자. 너무나 기초상식 수준의 물음인지라 답할 필요조차 못 느낄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을 당사자인 일본인들에게 던졌을 경우는 사정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 오늘날에도 이 질문에 즉답하길 주저하는 일본인이 적지 않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지리적으로 아시아에 위치한다는 사실까지 그들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 심리적 또는 집단정서의 층위에서 아시아와 일본은 별개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저층에는 그들만의 근대 경험이 가로놓여 있다. 그 첫 단추가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이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일본’이라는 사회는 이 말이 표방하는 후진적인 아시아로부터의 차별화, 선진적인 서양에 대한 동일화라는 방향 속에서 형성되었다.



아시아 일부면 침략당한다는 인식

고루한 동방 멀리하는 탈아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비서양국 자신감


유럽·아시아·일본의 3극 구도 상상

패전 후 문화국가 표방 G7 됐지만

중국·한국 부상하며 잃어버린 30년


아시아가 존재해야 했던 이유

1885년 탈아론을 주창했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얼굴이 인쇄된 1만엔권 지폐. 1984년부터 2024년까지 사용됐다. [사진 윤상인]

1885년 탈아론을 주창했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얼굴이 인쇄된 1만엔권 지폐. 1984년부터 2024년까지 사용됐다. [사진 윤상인]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귀에 익숙한 말이 있다.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정서적·문화적으로는 멀게 느껴지는 이웃 나라’라는 뜻이리라. 이 표현의 연원을 애써 찾는다면 아마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일 것이다. 중국·조선과 같은 ‘고루한 동방의 악우를 멀리하고 서양문명과 고락을 함께 하는 것’이 근대일본이 나아갈 길이라고 역설한 그의 주장은 당시에는 상식에 속했다. ‘일본은 동양의 국가여서는 안 된다’라는 제목의 신문사설(시사신보, 1884년 11월 11일자)이 아무렇지 않게 실리던 시기였다. 탈아론의 바탕에 깔린 것은 서구제국주의가 전파한 ‘문명/야만’의 이분법 세계관이었다. 낡은 관습에 사로잡혀 개혁에 소극적인 아시아를 멀리하자는 탈아론의 주된 논지는 문명화에 적극적인 일본조차 아시아의 일부로 간주하는 서양의 시각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서양세력의 눈에 일본이 아시아의 일원으로 비치는 한 언제든지 침략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는 유럽인들이 만들어낸 이름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해 뜨는 곳’ ‘동방’을 ‘Asu’로 불렀고, 여기서 ‘Asia’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다. 18~19세기에는 유럽이 동쪽의 ‘그들’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여 지리적·문화적 통일체로 구성하기 위해 아시아라는 용어를 활용했고, 자신들의 가치판단에 준거한 프레임으로 아시아를 관찰·재단하고, 아시아의 지역적 일체성을 날조했다. 다시 말해서 아시아·오리엔트는 유럽의 백인사회가 우월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열등한 비서구의 유색인종을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발명한 공간적 타자였다.

‘일본다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명예백인이라는 고독’이라는 제목이 붙은 삽화. 일본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윤상인]

‘명예백인이라는 고독’이라는 제목이 붙은 삽화. 일본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윤상인]


일본만이 비서양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일본인들의 자기인식은 스스로를 아시아로부터 분리하여 제3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동기를 제공했다. 그 첫 시도가 19세기 말에 서양사·동양사·국사(후일 일본사로 변경됨)로 출범한 역사 3분과 체제였거니와, 이 역시 일본의 발명품이었다. 이를 통해 아시아의 후진성을 입에 올리는 일본 스스로가 아시아의 일부라는 근본적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아시아를 중앙에 두고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는 유럽이, 동쪽 끝에는 일본이 위치하는 3극 구도를 상상하고 주장하는 것은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선진성과 서양에 대한 대등함을 주장할 수 있는 일본으로서는 최선의 지역적 조작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이 드러난 잡지 삽화. 근대적 군복을 입은 일본 군인이 전통의상 차림의 중국·조선인에게 근대병법을 가르치고 있다. 월간 ‘American Review of Reviews’ 1905년 10월호. [사진 윤상인]

러일전쟁 이후 일본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이 드러난 잡지 삽화. 근대적 군복을 입은 일본 군인이 전통의상 차림의 중국·조선인에게 근대병법을 가르치고 있다. 월간 ‘American Review of Reviews’ 1905년 10월호. [사진 윤상인]

유럽인들에게는 아시아가 유럽의 유럽다움이 무엇인지를 획정해주는 고루한 관습들로 점철된 외부였듯이, 일본인들에게도 아시아는 자신들의 근대성을 확인해주는 후진적이고 정체된 공간으로서 존재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며,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아니다’라고 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온 것은 인류사회가 생긴 이후 정착된 관습이다. 상대방과의 문화적 차이가 극명할수록 우리와 그들의 경계가 뚜렷해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에 그 차이는 보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과장되거나 때로는 날조되기도 했다. 중국·러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열강의 지위에 올라선 일본을 ‘동양 속의 서양’ ‘아시아의 백인’으로 간주하는 외부의 시선을 불편해하거나 거부한 일본인이 존재했다는 형적(形跡)은 찾을 수 없다. 일본의 예외적 성공이 부각될수록 일본 내에서 동양·아시아와의 차이를 본질화하는 시도가 강화되었다.

월간 ‘American Review of Reviews’ 1905년 12월호에 실린 ‘유일한 시대착오인 러시아 전제정치’. 작자 미상. [사진 윤상인]

월간 ‘American Review of Reviews’ 1905년 12월호에 실린 ‘유일한 시대착오인 러시아 전제정치’. 작자 미상. [사진 윤상인]


일본의 근대사가 탈아(脫亞)의 방향으로만 진행된 것은 아니다. 흥아(興亞)를 내세운 아시아주의가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도 있었다. 특히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한 1930년대가 그러했다. 아시아 국가들과 연대하여 구미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었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일본판 화이(華夷) 질서 구축에 대한 구상이 뼈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탈아론이든 흥아론이든 모두가 팽창주의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시아는 여전히 대외확장 욕망의 객체였다. 결국 유라시아 대륙의 양쪽 끝에 위치해서 아시아를 재구성하고 정치적·문화적으로 위압해왔던 두 팽창세력이 태평양전쟁을 통해 동남아시아 각지를 전장으로 삼은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을 것이다.

만화가 호소키바라 세이키가 ‘히노데’ 잡지 1942년 2월호에 게재한 삽화 ‘대동아공영 회의’. [사진 윤상인]

만화가 호소키바라 세이키가 ‘히노데’ 잡지 1942년 2월호에 게재한 삽화 ‘대동아공영 회의’. [사진 윤상인]


패전 후 문화국가를 표방한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체제 하에서 구미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경제부흥에 매진한 끝에 세계 제2의 경제대국, 그리고 서방선진국 G7의 일원이 되었다.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아니지만 경제 거인 일본이 중심이 된 지역 국가 간 분업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른바 ‘안항(雁行)’ 모델이다. 기러기가 떼를 지어 나는 모습은 위아래가 바뀐 V자 형태다. 일본이 맨 앞에서 날았고, 그 뒤를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따랐다. 그 뒤에는 태국·베트남·말레이시아 등 아세안 국가가 있었다. 모두가 기억하는 1970~80년대 동아시아지역 산업발전 모델이다. 힘자랑이 가능했던 과거와는 성격을 달리했지만, 일본은 아시아의 맹주로서의 위상을 근 한 세기를 이어온 셈이다.

서구의 동양 지배 양태를 비판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 표지 그림은 장 레옹 제롬의 ‘뱀 부리는 사람’, 1879년. [사진 윤상인]

서구의 동양 지배 양태를 비판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 표지 그림은 장 레옹 제롬의 ‘뱀 부리는 사람’, 1879년. [사진 윤상인]


그러나 1990년대부터 중국이 국제분업 체제에 참여하고, 한국과 대만 등이 일부 첨단산업에서 일본을 따라잡거나 추월하면서 안항 모델은 와해했다. 이는 일본의 자기 정체성 위기를 의미했다. 동시에 잃어버린 30년이라는 고난의 시기도 함께 찾아왔다.

중심 지향이 초래한 폐해

다와다 요코(多和田葉子)라는 일본 작가가 있다. 20대의 나이에 독일에 정착한 후 40년 이상 일본어와 독일어로 소설·시·희곡을 발표해온 이력을 지닌 작가이다. 일본과 독일의 언어, 문화에 익숙하지만 애써 그 어느 쪽에도 귀속하기를 거부하는 정신적 망명객을 자처한다. 그녀의 글에는 서구인들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틀어 비판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대놓고 말할 순 없지만/ 우리들은 이제/ 그것 없이는 살 수가 없어.’ 아시아 없이는 유럽인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다와다가 이 시를 쓴 이후 근 40년이 지난 지금, 서구인들이 경멸했던 ‘아시아적 전제’의 본산 중국은 최첨단기술과 산업력으로 서양을 위협하며 세계를 미·중 2극 체제로 재편했다. 그들은 수백 년간에 걸쳐 익숙히 보아왔던 아시아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중국뿐만 아니라 과거 식민지였던 한국·대만을 상대로 한 힘겨운 선두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모범생으로서의, 맹주로서의 우월한 자기상을 비춰주던 아시아라는 이름의 거울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시아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기에 대한 재정의이기도 하다. 일본은 스스로의 모습을 아시아와 서양이라는 두 개의 거울에 번갈아 비춰가며 자신의 위치를 정립해왔다. 어느 거울이 되었든 중심지향이라는 각도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비치는 자기상을 추구해온 것이다. 중심지향의 심리는 인간 모두에게 보편적인 것이겠지만 그것이 초래하는 폐해는 크고 지속적이다.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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