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호 |
스웨덴은 나에게 이케아와 노벨상의 나라였다. 솔직히 말해 그게 아는 전부였다. 오후 3시에 이렇게 깜깜한 어둠이 내릴 줄은 미처 몰랐다. 김이듬 시인과 함께 스톡홀름 국제 시 페스티벌에 초청받았다. 김이듬은 세계 각지에서 이미 수십 번 낭독을 해본 시인이었고, 나는 첫 해외 낭독이었다. 한국문학을 좋아하는 스웨덴 에디터가 수소문 끝에 나를 찾았다고 했다. 수소문. 변방의 무림 고수가 된 기분이었다. 잘해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낭독회 전날, 같은 페스티벌에 온 한 작가가 물었다. "너희 나라에 스타벅스 있어? 버거킹 있어?" 나는 황당했다. 차라리 김정은은 잘 있냐고 물어보지 그랬나.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도 그의 나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무슨 스키였어… 정확히 발음도 못 한다. 내가 스웨덴을 이케아와 노벨상으로 단순화했듯, 그도 나를 제3세계의 이미지로 단순화했을 뿐이다. 무지의 방향만 달랐던 거다.
언어란 쓰면 늘고 닫으면 줄어드는 법이다. 오랜만에 영어를 하려니 입이 굳어 있었다. 낭독회 날이 다가오자, 술에 취하면 외국어가 잘 나온다는 글을 본 기억이 어딘가에서 떠올랐다. 절실인지 미신인지 모를 마음으로 와인을 스트레이트로 두 잔 마셨다. 그리고 10분 뒤 무대 위로 올라갔다. 나는 번역을 거쳐야 윤곽이 드러나는 내 시가 조금이라도 더 청중에게 닿기를 바랐다. 그래서 한국에서보다 훨씬 배우처럼, 연기하듯, 노래하듯 읽었다. 몸을 쓰느라 온 몸이 시 다섯 편에 참전하는 기분이었다.
캣콜링을 읽다가, 스무 살의 뉴욕이 떠올랐다. 영어를 반쯤만 알던 시절, 말이 막히면 손이 먼저 나가고, 호흡은 커지고, 눈빛은 과장되었다. 이탈리아 친구가 말했다. "너랑 나는 물에 빠져도 살 거야. 남들은 허우적대는데 우리는 설명하느라 헤엄치고 있을걸?" 스웨덴에서 시를 읽으며 그 말이 다시 생각났다. 나는 또 살아남고 있었다.
이번 페스티벌에서 얻은 인연 중 하나는 마라 리(Mara Lee)였다. 한국에서 입양되었다고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둘째 날 저녁 무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그날은 오래전 한국에서 온 1세대 이민자들-대부분 할머니들이 객석을 채웠다. 시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낭독이 끝나자 한 할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요즘 한국 시는 이렇게 쓰냐며 무섭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모국어를 다시 들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며 한참을 놓지 않았다.
귀국 전날, 마라가 호텔로 나를 찾아왔다. 자신의 서명본을 건넸다. 한국어 알파벳을 다 잊어버렸다고 미안해하며 내 이름 '소호'를 '소분'이라고 적었다. 나는 잠깐 멈췄다. 틀린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생긴 이름 같았다. '소분.' 듣자마자 알겠다 싶었다. 마라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하나의 뿌리에서 소분된 사람들이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자랐고, 언어도 잊어버렸지만, 같은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어떤 가지처럼.
오후 3시에 밤이 되는 나라에서 나는 여러 종류의 이방인을 만났다. 손짓으로 살아남는 나, 한국어를 잃어버린 마라, 단 하루였지만 한국어를 되찾은 할머니들. 세계는 중심과 주변을 나누지만, 그 경계는 언제든 뒤바뀐다. 저마다의 위치를 말하는 것은 결국 중심부라고 믿어왔던 사람이 어느 세계에서는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디에 있든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 내가 스웨덴에서 시를 읽으며 손짓과 발짓을 다 쏟아부었던 것도 결국 그 때문이었다.
그날 내가 읽은 것은 시가 아니었다. 아주 많은 단 한 가지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에게 닿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시각물_이소호(본인 제공) 그래픽_이정화 |
이소호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