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뉴스
서울
맑음 / -3.9 °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기고] 호스피스·완화의료는 죽음 아닌 삶을 위한 제도다

조선일보 조규태 대한웰다잉문화협회 학술이사
원문보기
조규태 대한웰다잉문화협회 학술이사
조규태 대한웰다잉문화협회 학술이사

조규태 대한웰다잉문화협회 학술이사


한국 사회에서 ‘호스피스·완화의료’라는 단어는 여전히 무겁고 불길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많은 사람이 ‘더 이상 치료할 수 없을 때 가는 곳’, 혹은 ‘죽음을 기다리는 장소’로 인식한다. 하지만 이는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한 이해다. 호스피스·완화의료는 죽음을 앞당기거나 치료를 포기하는 제도가 아니라, 환자가 남은 시간을 최대한 인간답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의료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인 돌봄이다.

2018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됐지만, 현실에서 호스피스·완화의료는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호스피스 서비스 이용자는 해마다 증가 추세지만, 대상 환자 전체로 보면 여전히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상당수 환자가 임종 직전까지 고통스러운 치료를 반복하다, 호스피스에 대해 알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특히 현행 제도는 암 환자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심부전, 만성폐쇄성 폐질환, 신경계 퇴행성 질환, 치매와 같은 암 이외의 질환 환자들은 예후 예측이 어렵다는 이유로 호스피스 대상에서 배제되거나 접근이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동일하게 고통을 겪는 환자들 사이에 돌봄의 불평등이 발생하고 있다. 질환의 종류가 아니라 고통의 정도와 돌봄의 필요성을 기준으로 개선돼야 한다.

세계보건기구는 완화의료 대상을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에 국한하지 않고, 만성 질환 전반으로 확대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당뇨병, 만성 신경계 질환, 류머티스 관절염처럼 완치가 어렵고 삶의 질을 심각하게 저하하는 질환 역시 완화 의료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완화 의료가 단순히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삶의 질을 보장받을 권리임을 보여준다.

환자 가족에 대한 지원도 중요하다. 이들은 환자를 장기간 돌보면서 신체적 피로와 정서적 소진, 경제적 부담을 감당한다. 그러나 현행 제도는 가족 돌봄자의 고통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가족 상담, 심리 지원, 사별 후 애도 프로그램, 돌봄 휴가 제도 등이 함께 마련돼야 호스피스·완화의료는 비로소 삶 전체를 돌보는 제도로 완성될 수 있다.

해외에서는 지역사회 기반의 호스피스 모델이 정착되고 있다. 영국과 호주 등은 의료진, 사회복지사, 자원봉사자가 함께 참여하는 지역 연계 돌봄 체계를 통해 환자가 자신의 집과 익숙한 공간에서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불필요한 입원과 의료 처치를 줄여 국가 의료비 부담을 완화하는 효과도 있다.


호스피스·완화의료는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제도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다운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안전망이다. 잘 마무리하는 것 또한 삶의 중요한 과제다. 더 많은 국민이 두려움 없이 이 제도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제도적 보완과 사회적 인식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5분 칼럼' 더보기

[조규태 대한웰다잉문화협회 학술이사]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info icon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AI 이슈 트렌드

실시간
  1. 1손흥민 LAFC
    손흥민 LAFC
  2. 2아이브 안유진 가요대전
    아이브 안유진 가요대전
  3. 3미르 결혼식 논란
    미르 결혼식 논란
  4. 4윤종신 건강 악화
    윤종신 건강 악화
  5. 5파워볼 복권 당첨
    파워볼 복권 당첨

조선일보 하이라이트

파워링크

광고
링크등록

당신만의 뉴스 Pick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