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뉴스
서울
맑음 / -3.9 °
경향신문 언론사 이미지

[에디터의 창]음반 흉년의 시대, 명반의 귀환

경향신문
원문보기
2001년 개봉했던 김대승 감독의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었다. 주연배우들의 섬세한 감정 연기, 비 오는 날 인우(이병헌)의 우산 속으로 파고든 태희(이은주), 쇼스타코비치를 배경음악 삼은 바닷가 왈츠 장면 등은 요즘 영화와 비교해도 촌스럽지 않다. 영화 속 동성애 코드도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대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 거라고 당신이 말했었습니다.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마지막 대사는 이 영화만큼이나 생명력이 길다.

그런데, 기자에게는 <번지점프를 하다>가 영화보다 주제곡으로 먼저 각인됐다. 예고편의 배경음악으로 깔린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을 듣고, 이 영화는 꼭 극장에서 보리라 다짐했다. ‘퀸’의 프레디 머큐리 못지않은 가성으로 노래를 부른 이광조의 오리지널 버전을 좋아했는데, 영화 주제곡을 부른 김연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른 감흥을 줬다. 이 곡을 골라낼 정도의 선구안을 가진 감독 혹은 제작자가 만든 영화라면 일정 수준 이상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가수 본인도 애착이 컸는지, 이광조는 최근 발매된 새 앨범 <글로리 데이즈>(Glory Days)를 포함해 자신의 앨범에 몇차례 이 곡을 싣지만 첫 녹음의 소름 돋는 고음을 내지는 못한다.

이광조는 몇년 전 전주KBS의 <백투더뮤직>에 출연해 “지금은 그렇게 부르라면 못 부른다. 그때는 막 높은 데다가 묘했거든. 지금 이거를 이런 식으로 부르면 얼마나 좋을까. 때려죽여도 안 된다”고 했다.

서론이 길었던 건 이 아름다운 노래가 머리곡으로 실렸던 음반 <우리 노래 전시회>(1985)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그룹 ‘들국화’의 최성원이 프로듀싱을 한 이 옴니버스 앨범에는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 외에도 시대를 초월한 노래들이 빼곡하게 실렸다.

들국화로 데뷔하기 이전 전인권의 폭발적인 가창력을 엿볼 수 있는 ‘그것만이 내 세상’, 최성원의 ‘제발’, 시인과 촌장의 ‘비둘기에게’, 어떤날의 ‘너무 아쉬워 하지 마’, 강인원의 ‘매일 그대와’ 등. 작사가로 더 유명한 박주연이 직접 부른 ‘그댄 왠지 달라요’에서는 기교 없이 담백하고 고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1집만큼은 아니지만 2~4집에도 좋은 노래가 많이 담겼다. 1987년 발매된 2집에는 들국화의 ‘너의 작은 두 손엔’, 어떤날의 ‘그런 날에는’ 등이 실렸고, 3집(1988)에는 박학기의 ‘계절은 이렇게 내리네’, 푸른하늘의 ‘그대 다시 오면’, 4집(1991)에는 동물원 김창기의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등이 담겼다.

“노래라는 게 그렇다. 그 불가사의한 매력의 핵심을 쉽게 몇마디의 언어로 포착해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 이 곡이어야만, 이 글이어야만, 무엇보다도 이 목소리여야만 가능한 어떤 기적 같은 음악의 순간이 있다.” 24일 세상을 떠난 음악평론가 김영대씨의 책 <더 송라이터스>에 있는 말이다. 이 음반을 들었을 때 기자도 이런 순간을 경험했던 것 같다.

명반의 조건 중 하나는 생명력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리즈에 실린 몇몇 노래들은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에 지금도 올라 있고, 몇몇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됐다. 대다수 히트곡들이 반짝하고 잊히는 세상에서,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실제 당시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했던 음반 참여 가수들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중요한 뮤지션들로 성장했다. 1집은 경향신문과 가슴네트워크가 2007년 공동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72위에 올랐는데, 당연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이 음반들은 중고시장에서도 고가로 거래되는데, 음반 컬렉터들에게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기자 역시 1집 LP와 1~3집을 묶은 CD 박스반을 어렵게 구했다.


<우리 노래 전시회>의 리부트 앨범이 40년 만에 나온다. 다음달 5일 LP로 발매되는 앨범에는 한국대중음악상을 받은 포크 듀오 여유와 설빈의 ‘생각은 자유’, 오연준의 ‘서귀포 돌고래’ 등 11곡이 담겼다고 한다. 제작사가 공개한 앨범 재킷 이미지가 1집을 연상케 해 더 좋았다. 1~4집에 이어 리부트 앨범을 프로듀싱한 최성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기회가 아니면 묻혀가는 좋은 노래와 훌륭한 뮤지션이 너무 많다. 보석 같은 친구들을 발굴해 소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톱 가수들도 정규앨범을 좀처럼 내지 않는 음반 흉년의 시대에 귀한 시리즈의 귀환이 반갑다.

이용욱 문화에디터 겸 문화부장

▶ 매일 라이브 경향티비, 재밌고 효과빠른 시사 소화제!
▶ 더보기|이 뉴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 점선면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info icon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AI 이슈 트렌드

실시간
  1. 1손흥민 LAFC
    손흥민 LAFC
  2. 2아이브 안유진 가요대전
    아이브 안유진 가요대전
  3. 3미르 결혼식 논란
    미르 결혼식 논란
  4. 4윤종신 건강 악화
    윤종신 건강 악화
  5. 5파워볼 복권 당첨
    파워볼 복권 당첨

경향신문 하이라이트

파워링크

광고
링크등록

당신만의 뉴스 Pick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