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가려워서 새로 이사 온 동네 안과에 갔다. 알레르기성 결막염 같다고 말하고는 안약 처방을 부탁했다. 진료를 마친 의사는 비염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면서, 안약에 더하여 비염 치료제를 처방해 줬다. 그 뒤로 주기적인 가려움이 사라졌다. 내심 명의라고 감탄하는 한편, 예전에 다녔던 안과 의사가 그동안 엉뚱한 처방만 내렸다고 생각하니 허탈했다.
전문가와 상담하는 이유는, 그가 전문성을 바탕으로 올바른 진단과 처방을 해 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내가 B의 해결을 원하면서 A라고 말해도, 제대로 된 전문가라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파악하고 B를 해결해 줄 터이다. 벽면 도배지가 얼룩져 찾아갔을 때, 그저 그런 업자라면 도배만 새로 해 주고 말겠지만, 정말 전문가라면 얼룩의 원인이 천장 누수 때문임을 밝혀내고 천장 방수부터 해야 함을 조언해 준다.
내가 참여하는 사회정책연구회의 올해 마지막 세미나 주제는 ‘신청주의 vs 자동지급’이었다. 수개월 전 이재명 대통령이 복지 신청주의는 잔인하다면서 자동지급 전환을 검토하라고 발언한 이후, 보건복지부가 자동지급 방안 마련에 고심 중이기에 이를 택했다.
대표적인 저소득층 지원 제도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본인이 수급신청을 해야, 정부가 자격 요건을 심사하여 충족한다고 판단하면 급여를 지급한다. 자격 요건이 복잡해서 확실한 빈털터리가 아니면 수급자가 될 수 있는지 알기 어렵다. 게다가 자신의 빈곤을 증명하기 위해 내야 하는 서류도 제법 많으며, 한 번에 끝나지 않고 이것저것 보완 제출도 빈번하다. 그래서 웬만한 사람이라도 상당한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하물며 국민기초생활 수급 대상자 중에는 거동 불편, 심신미약 등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자발적 신청이 매우 어렵다. 게다가 신청부터 심사를 거쳐 급여가 지급될 때까지 두 달 이상 긴 시간이 걸린다.
신청 안 해 못 받는 ‘사각지대’ 해소
이런 상황에서 본인 신청 없이도 알아서 수급 요건을 판정하여 신속하게 급여를 지급하는 ‘자동지급’은 대상 국민의 편의성을 크게 높이는 한편, 신청 안 한 탓에 급여를 못 받는 사각지대를 없앨 수 있다. 디지털·AI 시대의 행정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으로 환영해 마지않아야 마땅하겠다. 그런데 이 분야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과 일선 공무원까지 참여한 세미나 분위기는 뜻밖에도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왜 그럴까?
다양한 비판 혹은 우려가 제기되었는데, 그중 참석자 모두가 동의한 것은 토론자였던 L박사의 지적이었다. 이런 내용이다. “자동지급으로 줄일 수 있는 사각지대 규모는 제한적이다. 지원이 필요하지만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은 대부분 신청을 안 해서가 아니라 신청해도 자격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빈곤 때문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동지급이 아니다. 어려움을 겪는 원인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은 세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자격 요건은 충족하나, 신청을 안 한 탓에 지원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또 하나는 지원이 필요하지만 자격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사람이다. 마지막은 빈곤보다는 다른 이유, 이를테면 거동 불편, 고독, 가족 돌봄 등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이다. 복지 사각지대의 심각성을 세상에 알린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은 두 번째 유형에 해당한다. 이들은 신청을 안 해서가 아니라 자격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서 급여를 받지 못한 경우이다. 최근 수차례 언론에 보도된 ‘간병 살인’ 혹은 ‘간병 자살’은 빈곤해서가 아니라 가족 간병이 너무 힘들어서 벌어진 비극으로 세 번째 유형에 속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자동지급을 얘기했을 때도 첫 번째뿐만 아니라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형의 사각지대 해결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그날 발제자였던 K박사는 “이 대통령 발언은 오진이었다. 하지만 복지부는 제대로 진단하고 처방을 내려야 한다”고 평했다. 나는 이 말에 절반만 동의한다. 이 대통령은 복지전문가가 아니다. 그러니 대통령의 발언은 사각지대 문제를 제기한 것이지 진단을 하거나 해법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대통령의 문제 제기에 대해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고 올바른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전문집단인 복지부가 해야 할 일이다. 자동지급을 언급한 까닭이 사각지대를 해소함으로써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혹은 견딜 수 있게) 하는 데 있음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복지부 대응이 어떠해야 할지도 분명하다.
자동지급 외 다른 해법도 꼭 필요
한편, 또 다른 토론자였던 N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동지급만으로 복지 사각지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은 맞다. 자격 요건 완화도 필요하고 여러 이유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상황을 파악해 맞춤 지원도 해야 한다. 그런데 자동지급은 이런 목적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현행 복지사업 개수는 대략 중앙정부 것이 400개, 지방정부 것이 4500개가 된다. 지금의 신청주의 시스템으로는 이 많은 사업의 혜택이 누구에게 얼마나 어떻게 전달되는지 파악이 안 된다. 제도를 잘 활용하는 사람은 많은 혜택을 누리는 반면, 훨씬 어려운 처지에서도 전혀 혜택을 못 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자동지급을 하려면 중앙·지방 복지사업 통합 전산망을 구축해야 하므로, 이를 바로 파악할 수 있다. 그동안 자격 심사에 업무 시간 대부분을 빼앗겼던 일선 공무원들은, 지원이 필요한 수급 탈락자의 상황 파악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 자원이 있고 상황을 알면 맞춤형 급여 제공이 훨씬 용이하다.”
그날 참석자들은 다음 두 가지에 합의했다. “자동지급으로의 전환은 우리 복지제도의 효과성을 한층 높일 수 있는 기반이 되므로, 적극적으로 그러나 신중하게 추진하자. 단, 자동지급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복지부는 이 대통령이 탈신청주의를 언급한 진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복지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해법을 만들고 추진하자.”
이제 아재 개그 스타일로 본 칼럼을 마무리하자. 이심정심(李心鄭心). 이재명 대통령의 진심이 정은경 복지부 장관에게 잘 전달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대통령이 쿵하고 문제를 제기하면 복지부가 짝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환상의 호흡을 앞으로 기대한다.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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