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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의 어머니, 고객이던 아버지···'양공주'의 후손, 침묵당한 목소리를 기록하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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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연구
그레이스 M. 조 지음 | 성원 옮김
동녘 | 396쪽 | 2만5000원
한국전쟁 시기 한 어린이가 폐허가 된 집터 위에 서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자료다. 도서출판 동녘 제공

한국전쟁 시기 한 어린이가 폐허가 된 집터 위에 서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자료다. 도서출판 동녘 제공


“여자가 말할 수 있는 기억은 거의 존재하지 않아. 여자는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고, 완전히 뜬금없는 걸 기억할 때도 있지.”

뉴욕시립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젠더연구 등을 가르치는 한국계 미국인 그레이스 M. 조는 스물세 살이던 1998년 한국계 미국인 페미니스트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양공주’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접했다. “나의 어머니가 한때 기지촌에서 일했고, 기지촌 클럽을 드나들 수 있는 미군 상선 선원이던 나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고객이었다는 비밀을 알고 몇년이 흐른 뒤였고, 나는 아직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중이었다.”

<유령 연구>는 가족의 비밀과 조우하고 “정체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한 저자가 어머니의 삶을 복원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의하기 위해 ‘양공주’의 역사 속으로 파고들어가 만들어낸 학문적 결과물이다.


미군 기지촌 성노동자라는 존재는 한국전쟁의 산물이다. 2차 세계대전보다 민간인 사망률이 높았던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한국에서 기지촌의 성노동자들은 한편으로는 ‘달러를 벌어들이는 전사’로 미화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멸시의 대상이 됐다. 국가와 사회는 이들의 안전에는 무심했다. 1992년 윤금이씨 살해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미군에 의한 기지촌 성노동자들의 죽음은 거의 공론화되지 않았다.

미국 이주한 기지촌 성노동자의 딸
어머니 삶 복원 위한 학문적 시도

평범한 미국 가정이란 환상 위해
과거를 삭제했던 기지촌 여성들
존재하나 실체 없는 ‘유령’의 삶

미군과의 결혼을 통해 미국으로 이주하는 데 성공한 여성은 10만명이다. 미국 대중매체는 이 여성들을 ‘군인 신부’ 또는 ‘전쟁 신부’ 같은 낭만적 표현으로 포장했다. 미군과의 결혼을 통해 미국 사회에 동화된 일종의 ‘신데렐라’ 또는 ‘명예 백인’으로 이미지화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상당수 여성들의 결혼 생활은 남편의 폭력, 생활고, 가족의 외면 등으로 점철됐다.

미국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여성들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들은 과거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평범한 미국 가정’이라는 판타지를 유지했으나,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과거와의 단절은 이 여성들을 분명히 존재하지만 실체가 잡히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전쟁의 트라우마와 스스로 과거를 삭제한 정신적 트라우마가 저자의 어머니처럼 정신질환으로 발병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기지촌 성노동자들에 대한 연구는 중대한 어려움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말해질 수 없는 것, 기록되지 않은 것, 역사에서 삭제된 것, 당사자조차 말할 능력을 잃어버린 일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령 연구>는 일반적인 사회학 학술서와는 다른 길로 간다. 저자는 역사적·사회적 사실을 체계적으로 기술하는 것보다는 여성들의 파편적인 구술, 한인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문학작품, 저자 자신의 개인적 체험 등이 뒤섞인 실험적 글쓰기에 집중한다. 저자는 여러 여성의 목소리를 중첩시키고 사실과 허구의 경계도 넘나든다. 이처럼 비선형적이고 실험적인 서사를 사용하는 이유는 트라우마의 경험은 논리적이고 정돈된 형태로 드러낼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유령 연구>는 독자들에게 학문적 글쓰기와 예술적 글쓰기 사이를 부유하는 듯한 독서 체험을 제공한다.

기지촌 성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유령처럼 희미해진다 하더라도 이들이 경험한 전쟁과 폭력의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고 사회를 배회한다. 저자는 ‘초세대적 배회’라는 개념을 통해 부모 세대가 말하지 않은 트라우마가 자식 세대에게 전달된다고 전한다. 저자는 “초세대성 개념은 기억이 한 다리를 건너뛸 뿐만 아니라 여러 다리를 건너뛸 가능성을 빚어낸다”며 “누군가의 어머니의 목소리는 그 할머니의 기억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떤 목소리가 참나무에서 나왔어. 그 나무줄기 안에 영혼이 갇힌 어떤 친한 이의 목소리였는지, 이 목소리가 여자는 보지 못하는 걸, 혹은 여자의 어머니는 말하지 못하는 걸 여자에게 말하려고 했는지, 이게 침묵당한 역사의 목소리인지 나는 알지 못해. 여자는 나무에서 나오는 이 목소리를 접했고 그 비밀에 부쳐진 말들을 발화함으로써 그걸 세상에 풀어놨지. 하지만 그 말들을 내뱉는 건 목소리를 증식시키는 일이기도 했어.”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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