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서울 명동 환전소 전광판에 환율 시세가 나타나고 있다. 하루 전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 이후 달러당 원화값은 크게 뛰었다.(환율은 하락) 뉴스1 |
최근 외환보유액 ‘4000억 달러’를 둘러싼 적정성 논쟁이 재점화됐다. 정부가 원화가치 급락을 막기 위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다 연간 2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해야 한다는 부담까지 더해지면서다.
외환보유액은 국제수지 불균형을 보완하거나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보유한 외화자산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국가의 달러 체력’ 이자, 환율위기 때 꺼내 쓸 ‘비상금’이다. 1997년 달러가 부족해 쓰라린 경제위기를 겪은 한국은 외환보유액 4000억 달러를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기며 민감하게 반응한다.
25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지난달 말 4306억6000만 달러(약 624조원)로 집계됐다. 운용수익과 금융기관 외화예수금이 늘면서 한 달 전보다 18억4000만 달러 늘었다. 규모만 놓고 보면 세계 9위 수준이다. 외환보유액은 2018년 6월 4000억 달러를 처음 넘어선 뒤, 2021년 코로나 19 시기에 4600억 달러 안팎까지 늘었다. 이후 감소와 반등을 거쳐 최근엔 4000억 달러 초반대를 유지하고 있다.
신재민 기자 |
최근 외환보유고 적정성 논란에 다시 불을 붙인 건 원화 가치가 달러당 1480원 선까지 추락하자 정부가 적극적인 시장 개입에 나섰기 때문이다. 한은은 환율 변동성을 누그러뜨리려 자체 시장 개입(스무딩 오퍼레이션)을 병행하고 있는데, 시장 안팎에선 당분간 외환보유액이 감소할 수 있다고 본다. 실제 정부가 지난 24일 강도 높은 개입 의사를 밝히자 달러당 원화값은 하루 만에 33.8원 치솟으며 1440원대로 올라섰다.
여기에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 따른 연간 200억 달러 상한의 대미 직접투자도 부담 요인이다. 정부는 외환보유액의 이자ㆍ배당 수익 범위에서 집행해 원금에는 영향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감소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4000억 달러 밑으로 내려가면 심리적으로 불안해진다”며 “지금 외환보유액을 써서 환율을 방어하기는 쉽지 않다”고 짚었다.
이 때문에 4000억 달러의 ‘실탄’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외환위기 경험을 토대로 외환보유액은 최소 1년간의 상품ㆍ서비스 수입액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 근거다. 지난해 한국의 연간 수입액(약 6320억 달러)을 기준으로, 현재 외환보유액(4306억 달러)은 약 8개월치에 해당한다. 반면 5500억 달러의 대미투자 계획인 일본의 경우 지난해 수입액(7426억7000만 달러) 대비, 외환보유액(1조2307 달러)은 약 19개월분에 해당한다.
국내총생산(GDP) 외환보유액 비중으로 따져도 아시아 국가 중 적은 편에 속한다. 지난해 말 기준 한국의 명목 GDP(1조8697억 달러) 대비 외환보유액(4156억 달러)은 약 22.2%다. 일본은 30.6%에 달한다. 반면 대만의 명목 GDP(7970억 달러)는 한국의 절반 수준에 못 미치는데, 외환보유액은 5767억 달러에 달한다. GDP 대비 73.7%로 상당히 높다. 대만의 외환보유액은 지난 9월 6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신재민 기자 |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향후 10년간 총 2000억 달러의 대미 직접투자와 ‘마스가(조선 협력)’ 관련 1500억 달러 지원은 단기적으로 달러 부족과 환율 불안을 키울 수 있다”며 “외환보유액을 국제기구 권고 기준인 (현 수준보다) 최소 두 배 이상 확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통화기금(IMF)ㆍ국제결제은행(BIS)이 제시한 지표들을 반영하면 5200억 달러~9000억 달러를 비축해야 한다는 근거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앞서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외환보유액에 대해 “발생 가능한 광범위한 외부 충격에 대응하기에 충분한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아세안+3 거시경제조사기구(AMRO)도 최근 “외환보유액은 단기 외채의 2.6배로, 잠재적 충격에 대해 상당한 완충 효과를 제공한다”고 평가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IMF가 제시하는 외환보유고 적정성 지표는 주로 고정환율제도를 유지하는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한 산식”이라며 “한국은 완전 변동환율제도 국가로 그 기준이 더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재차 강조했다.
대미투자와 관련해서도 “양해각서(MOU)에 한국 외환시장에 불안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하게 돼 있다”며 선을 그었다. 한은은 최근 “1조 달러가 넘는 순대외자산(대외금융자산-대외금융채무) 증가로 원화 약세 압력이 커졌지만, 외환 안전판과 대외건전성이 강화됐다”는 진단도 내놨다.
신재민 기자 |
상당수 전문가는 외환보유고를 무작정 늘리는 게 정답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김정식 교수는 “원화값 급락(환율 급등) 국면에서 달러를 사들이면 오히려 환율을 자극할 수 있고, 미국이 외환시장 개입을 환율조작으로 감시하는 상황에서 적극적인 달러 매입은 사실상 어렵다”고 설명했다.
비용도 많이 든다. 달러를 사들이는 과정에 발행한 통화안정증권(통안증권) 이자로 지난해 4조원이 나갔다. 달러 표시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이자는 올해 6000억원에 달한다.
외환보유액 규모보다 ‘방어력’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도 많다. 외환시장은 숫자의 싸움이라기보다 심리전의 성격이 강하다. 외환보유액 규모보다 정부와 외환당국이 어떤 전략과 메시지로 시장의 불안을 관리하느냐가 '방어력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본부장은 “어렵겠지만 정부가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맺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라며 “단 1달러도 오가지 않아도 외환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박유미 기자 park.yum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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