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절 찰리 채플린. |
1920년대 인기 희극 배우 겸 영화 감독 찰리 채플린(1889~1977)은 금세라도 일본 또는 조선에 올 것처럼 보였다. 조선일보는 1923년 1월 3일 채플린이 상하이를 거쳐 일본에 올 예정이라고 전했다.
“미국 활동사진 배우로 셰계에 유명한 ‘찰리 채풀린’은 금년 봄에 셰계를 주유할 터인데 활동배우 오십명과 동행하야 상해를 것쳐서 일본까지 올 예뎡이라 하며 그의 타고 올 배는 동양긔선회사와 계약하고 선비 이십오만원에 작뎡하얏고 그가 셰계를 주유하면셔 그의 텬재인 희극(喜劇)을 발휘할 터이오 인하야 사진까지 박을 터이라더라”(1923년 1월 3일 자 석간 3면)
5년 후인 1928년 4월 10일 자에 채플린이 일본에 올 것이란 기사가 또 실렸다.
“몃해 전부터 일본을 방문하리라고 떠들든 세계뎍 희극 명배우 ‘찰-스, 촤푸린’씨는 구월에 일본을 방문하리라는데 일본에 활동 사진 팬들은 물론 일반 사회에서 긔대한다더라.”(1928년 4월 10일 자 석간 3면)
희극왕 촤푸린, 장 인플렌쟈까지 발병. 1929년 3월 5일자 3면. |
“일본을 것처서 래년 이월 사일에 인천에 입항할 아메리칸 익스푸레스사(社) 세계 주유단 450명은 서울도 시찰할 모양인데 이 속에는 세계뎍 희극 배우인 ‘차-리, 촵푸린’씨도 참가할 모양이라더라.”(1928년 12월 13일자 석간 3면)
채플린 표기는 ‘채풀린’ ‘촤푸린’ ‘촵푸린’으로 다양하다. 채플린이 도착했다는 후속 보도는 없었다. 대신 ‘병태(病態) 험악한 희극왕 ‘촤푸린’/ 장 인플렌쟈까지 병발’(1929년 3월 5일 자), ‘촤푸린은 죽지 않았다/ “나는 살아있소” 하고 전국 팬에게 통뎐(통전)’(1929년 4월 5일 자) 기사가 이어졌다. 건강이 좋지 않아 여행 계획을 취소한 것으로 보인다.
촵푸린 시대. 작일 밤 동경역에 도착해. 1932년 5월 16일자 2면. |
공교롭게도 도쿄에 도착한 이튿날 대형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총리가 암살당한 5·15 사건이다. 1932년 5월 15일 오후 5시 10분 일본 해군·육군 청년 장교 6명이 총리 관저를 습격해 당시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를 살해했다.
동경에 폭탄 소동. 이누카이 수상 사망. 1932년 5월 16일 호외. |
채플린은 이날 이누카이 총리가 관저에서 여는 환영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계획을 변경한 덕에 화를 면했다. 사건이 벌어지던 시간 채플린은 총리의 아들(이누카이 다케루)과 스모 경기를 관람했다.
채플린은 1936년 3월 다시 일본을 찾았다. 대형 사건이 직전에 또 벌어졌다. 육군 청년 장교들이 1400명 병력을 이끌고 정부 요인을 살해한 쿠데타 2·26 사건이다. 조선총독과 총리를 지낸 사이토 마코토, 전 총리 다카하시 고레키요 등이 사망했다.
채플린은 도쿄에서 일어난 대형 사건 소식을 일본으로 오는 배 위에서 들었다. 3월 6일 요코하마에 도착해 하루만 머물고 상하이로 떠났다. 동남아 여행을 마치고 5월 다시 일본에 들렀다. 인천·서울까지는 오지 않았다.
조선에서 채플린에 대한 관심은 컸다. 영화뿐 아니라 사생활 관련 기사도 많이 나왔다. ‘희극 명우 채플린 또 다시 이혼’(1927년 1월 13일), ‘문제 많은 채플린의 연예 생활’(1927년 3월 3일자), ‘채플린 일광욕’(1931년 7월 4일) 같은 기사가 이어졌다.
채플린 별세. 1977년 12월 27일자 3면. |
채플린은 1977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 스위스 레만 호숫가 코르시에 자택에서 88세에 하늘로 떠났다.
부음 기사는 ‘헐렁한 자루바지와 콧수염은 상표/ 52년 미(美)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쫓겨났으나 영(英)선 훈장’, ‘런던 빈민가 출신… 결혼 네 번/ 자녀 10명 중 7명이 연예계서 활약’(1977년 12월 27일 자 3면)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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