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생, 잘사] <6>
단식존엄사 예찬자가 말하는 '좋은 죽음'
존엄하게 죽을 권리 설파하는 대만 의사 비류잉 인터뷰
2001년 그는 진행성 소뇌실조증 확진을 받았다. 몸을 가눌 수 없게 되는 병이다. “때가 되면 알아서 떠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가족에게 부탁했고, 20년 뒤 ‘때’가 왔다. 식사도, 용변 처리도, 목욕도 혼자 할 수 없었다. 머잖아 몸 여기저기에 관을 꽂은 채 누워 지내야 할 터였다. 그 고통이 죽음보다 싫었다. 그래서 밥을 끊었다. 하루 두 끼에서 한 끼로, 다시 반 끼로, 연근 우린 물 한 모금으로. “이러다 못 떠나겠어.” 조바심에 물도 끊었다. “울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21일 만에 83세를 일기로 집에서 눈을 감았다. 가족들은 정말로 울지 않았다. 처음부터 단식을 강하게 말리지도 않았다. “훌훌 떠나겠다”는 선택을 지지해서였다.
무작정 굶은 건 아니다. 의료진이 식단을 관리하고 통증완화 처치를 하며 곁을 지켰다. 큰딸인 비류잉 대만 재활의학과 의사가 그렇게 어머니를 배웅했다. 그 여정을 담은 책이 지난해 번역 출간된 ‘단식존엄사’다. 의학계에선 이런 죽음의 방식을 ‘자발적 영양·수분 공급 중단(VSED·Voluntarily Stopping Eating and Drinking)’이라 부른다. VSED는 서구 일부 국가에서 시행 중이고, 한국에서도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다. 노년의 비참을 생생하게 그려서 화제가 된 한국영화 ‘사람과 고기’(2025)에도 나온다.
생명 경시를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비류잉은 각국을 다니며 단식존엄사를 알린다. 최근 한국에 온 그를 만나 어머니를 왜 그렇게 보내야 했는지, 왜 그런 활동에 열심인지를 물었다. “의료사 아닌 자연사할 권리를 위해서, 존엄한 죽음이 보장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했다. 대만과 한국의 의료현실이 다른 데다 민감한 문제인 만큼, 인터뷰 과정에서 김대균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권역별 호스피스센터장의 자문을 받았다.
단식존엄사 예찬자가 말하는 '좋은 죽음'
존엄하게 죽을 권리 설파하는 대만 의사 비류잉 인터뷰
편집자주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이 과제인 시대입니다. 행복하게 살다가 품위 있게 늙고 평온한 죽음을 맞으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최문선 논설위원과 함께 해법을 찾아봅니다.“어머니가 보고 싶지만, 단식존엄사를 택하지 않았다면 훨씬 더 큰 고통을 겪으셨을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놓여요.”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만난 대만 의사 비류잉의 말이다. 강예진 기자 |
2001년 그는 진행성 소뇌실조증 확진을 받았다. 몸을 가눌 수 없게 되는 병이다. “때가 되면 알아서 떠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가족에게 부탁했고, 20년 뒤 ‘때’가 왔다. 식사도, 용변 처리도, 목욕도 혼자 할 수 없었다. 머잖아 몸 여기저기에 관을 꽂은 채 누워 지내야 할 터였다. 그 고통이 죽음보다 싫었다. 그래서 밥을 끊었다. 하루 두 끼에서 한 끼로, 다시 반 끼로, 연근 우린 물 한 모금으로. “이러다 못 떠나겠어.” 조바심에 물도 끊었다. “울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21일 만에 83세를 일기로 집에서 눈을 감았다. 가족들은 정말로 울지 않았다. 처음부터 단식을 강하게 말리지도 않았다. “훌훌 떠나겠다”는 선택을 지지해서였다.
무작정 굶은 건 아니다. 의료진이 식단을 관리하고 통증완화 처치를 하며 곁을 지켰다. 큰딸인 비류잉 대만 재활의학과 의사가 그렇게 어머니를 배웅했다. 그 여정을 담은 책이 지난해 번역 출간된 ‘단식존엄사’다. 의학계에선 이런 죽음의 방식을 ‘자발적 영양·수분 공급 중단(VSED·Voluntarily Stopping Eating and Drinking)’이라 부른다. VSED는 서구 일부 국가에서 시행 중이고, 한국에서도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다. 노년의 비참을 생생하게 그려서 화제가 된 한국영화 ‘사람과 고기’(2025)에도 나온다.
생명 경시를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비류잉은 각국을 다니며 단식존엄사를 알린다. 최근 한국에 온 그를 만나 어머니를 왜 그렇게 보내야 했는지, 왜 그런 활동에 열심인지를 물었다. “의료사 아닌 자연사할 권리를 위해서, 존엄한 죽음이 보장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했다. 대만과 한국의 의료현실이 다른 데다 민감한 문제인 만큼, 인터뷰 과정에서 김대균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권역별 호스피스센터장의 자문을 받았다.
죽음의 자기결정권 극대화...'자살 방조'는 아닌가
비류잉(오른쪽)과 그의 어머니. 1937년생인 어머니는 강인한 여성이었다. 발병 뒤에도 어머니는 한숨 쉬는 일도 거의 없었다. 못 걷게 되면 어떡하냐고 가끔 걱정할 뿐이었다고. 비류잉 제공 |
Q. 스스로 원하셨다 해도, 결국 어머니를 굶어 죽게 한 것 아닌가요.
“어머니는 연하기능이 떨어져 식사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아니면 콧줄을 해야 했는데 절대로 싫다고 하셨죠. 과거엔 생애 말기에 음식을 끊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소화·흡수가 안 되는데 억지로 먹는 것이 훨씬 더 큰 고통이에요. 가족이라고 그런 고통을 강요하면 되나요. 어머니는 단식 때문에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가족과 의료진 도움으로 고통의 시간을 자발적으로 단축한 거예요. 남은 날이 얼마 없다는 걸 알았기에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소중했고, 정성껏 작별할 수 있었어요. 어머니도 차분히 삶을 정리하셨고요.”
Q. 대만에서 약물 주입 등을 통한 의사조력자살이 합법이었다면 어머니 선택이 달라졌을까요.
“글쎄요. 다만 둘 중 선택이 가능한 미국 등에선 단식존엄사를 택하는 경우도 꽤 있다고 합니다. 약물 주입이 더 비인간적이고 부자연스럽다는 인식 때문에요. 의사조력자살도 과정은 험난해요. 신청, 심사, 반려, 재신청 등 절차가 겹겹이고, 외국까지 가야 한다면 언어, 비용 등 문제가 있죠. 물론 단식존엄사도 길고 고통스럽습니다. 어머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와중에 방법을 찾은 거예요. 제가 이런 활동을 하는 건 존엄한 죽음의 권리가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고요.”
Q. 지켜보기 괴롭지 않았나요. 자살 방조와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단식 초기엔 어머니가 정신이 맑아지고 힘이 난다더니, 2주쯤 지나자 견디기 힘들어하셨어요. ‘주사 한 대로 빨리 떠날 순 없느냐’고 호소하셨죠. 비통했습니다. 하지만 임종 직전의 고통은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어요. 단식존엄사의 고통이 10 중에 2라면 말기 연명의료로 인한 고통은 8, 9라는 미국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자살 방조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불법이라고 규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긍정적 측면도 봐야 해요. 좌절한 환자가 충동적으로 자살하거나 돌봄 부담으로 가족을 ‘간병 살인’하는 것을 막을 수 있어요. 어느 쪽이 더 큰 불행인가요?”
"존엄하지 못한 마지막을 보내는 고통이 죽음보다 싫다"
의사로서 어머니가 무의미한 고통을 감내하도록 둘 수 없었다는 비류잉. 의료서비스를 거부할 자유, 음식을 거부할 자유도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강예진 기자 |
Q. 삼남매가 어머니 뜻에 선뜻 동의한 것이 놀랍습니다. 보통은 ‘살아만 있어 달라’고 빌게 되죠.
“전쟁(국공내전) 풍파 속에 사실상 고아로 자라서인지, 부모님은 전통적 가치관에서 자유롭고 생과 사에 초연했어요. 아버지는 ‘구급차 부르지 말라’고 평소에 신신당부하셨고, 그래서 딱 하루를 앓다가 93세에 집에서 떠나셨습니다. 소뇌실조증은 유전돼요. 병을 물려받은 가족과 친척이 악화하는 과정을 지켜봤기에 어머니는 존엄하지 못한 마지막을 더 두려워하신 듯해요.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자신 말고 아픈 가족 입장에서 판단하세요. 무의미한 연명의료로 본인이 원하지 않는 고통의 시간을 끄는 것이 사랑일까요? 어떤 경우엔 손을 놓는 것이 더 큰 사랑일 수도 있어요.”
Q. 2022년 책을 낸 뒤 도와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는다고요. 어떻게 돕나요.
“불필요한 관 삽입을 거부하는 ‘발관운동’을 하고, 집에서 임종하거나 단식존엄사할 수 있도록 의료 지원도 합니다. 치료·회생 가능성 없는 가족을 수십 년간 돌본 분들과 당사자의 지원 요청이 많아요. 죽음이 사회적 금기여서, 의사가 알려주지 않아서 연명의료 거부 제도가 있다는 걸 모르는 채로요. 그간 약 200명의 존엄한 죽음을 지원했고, 감사 인사를 받고는 해요. 공격도 받지만 무섭지 않아요. 여성을 ‘돌봄 지옥’에서 해방시키는 보람, 정보에 어두운 취약계층의 선택 기회를 넓힌다는 보람이 크니까요. 저를 둘러싼 논란이 커질수록 법제도가 빨리 정비된다는 생각에 기쁩니다.”
Q. 죽음을 돕는 의사라니요. 사람을 살리는 게 의사의 소명 아닌가요.
“시대가 바뀌었으니 의사 역할도 달라져야 해요. 환자가 덜 고통스럽게, 여한 없이 떠나게 돕는 것도 중요한 소명이에요. 의료윤리의 핵심은 환자의 이익입니다.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견디게 하는 게 윤리적인가요. 의사와 정책담당자들이 무슨 자격으로 타인의 자기결정권을 빼앗나요. 사망은 의료의 실패가 아닙니다. 어떤 의사들은 삽관, 심폐소생술 등을 ‘사망세트 형벌’이라 불러요. 본인들은 거부하겠다면서도 환자를 놔주지 못하는 데는 의료소송 문제도 있습니다.”
'내가 죽을 권리'가 '네가 죽을 의무'가 된다면...
지난해 번역 출간된 '단식존엄사'. 원제는 '안녕, 엄마(Farewell, My Mother)'. |
Q. VSED 공론화를 대만 장애인 단체들이 강하게 비판한다고 들었습니다. “알아서 빨리 죽으라는 거냐”면서요.
“누구든 생존·생명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제가 누구에게 ‘죽어라, 말아라’ 하는 것도 아니에요. 잘 살 권리만큼 중요한 잘 죽을 권리도 찾자는 겁니다.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데, 무지와 공포 속에 죽음에 대한 권리가 방치돼 왔으니까요. 아파서, 경제활동을 못 해서, 병원비를 많이 써서 가족과 사회에 민폐 끼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게 아시아 문화입니다. 죽음의 자기결정권 논의가 ‘죽어야 하는 의무’로 변질될 수도 있는 환경이죠. 하지만 그럴수록 촘촘한 예방책을 만들면 됩니다. 겁부터 먹고 논의 자체를 포기하면 안 돼요.”
Q. 어머니와 이별 후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나요. 어떤 ‘잘 죽을 준비’를 하고 있나요.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어요. 죽음의 공포는 미지에서 와요. 덜 고통스럽게 떠나는 방법도 있다는 걸 아는 게 위안이 됩니다. 삽관, 심폐소생술 등을 하지 않을 거고, 연명의료가 무의미해지는 때가 오면 단식존엄사를 시도하겠다고 아이들에게 말해 두었어요. 기록으로 남기려고 최근 낸 새 책에도 자세히 적어 뒀죠. 인류는 보잘것없고, 산다는 건 당연하지 않아요. 삶을 소중히 여기세요. 그래야 후회 없이 용감하게 죽음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Q. ‘좋은 죽음’, 그리고 ‘좋은 삶’이란 뭘까요.
“우선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 모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야 해요. 집처럼 익숙한 곳에서 죽을 수 있어야 하고, 약을 써서라도 몸의 통증과 마음의 불안을 줄여야 합니다. ‘현재를 훌륭하게 살려면 반드시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좋은 죽음은 좋은 삶의 일부이고, 좋은 죽음이 좋은 삶을 완성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방식의 좋은 죽음을 맞으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아서 잘 살아갈 힘이 될 거예요.”
비류잉의 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김대균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권역별 호스피스센터장
"VSED가 주류 의학계의 지지를 받는 건 아니다. 곡기를 끊고 평화롭게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상상한다면 오산이다. 탈수 등으로 인한 고통이 극심하다.
대만은 2000년 아시아 최초로 환자의 연명의료 자기결정권을 법으로 보장했고, 관련 제도가 한국보다 전향적이다. 2019년 시행된 환자자주권리법은 심폐소생술 등 전통적 연명의료 외에 인공영양·수분 공급을 거부할 권리도 명시했다.
그러나 공백이 많다. 한국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이 무료이지만, 대만에선 약 10만 원의 비용이 든다. 연명의료 중단 대상이 한정적이고, 결정 절차도 더 까다롭다. 지역사회 돌봄·간병시스템도 취약하다.
결국 VSED가 대만에서 지지받는 건 이러한 제도적 실패에 따른 풍선 효과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우회로로 택하는 경우가 많다.
비류잉의 활동이 선진적 죽음 문화에 대한 고민과 토론을 활성화하는 물꼬가 된다면 긍정적이다. 비류잉 가족처럼 존엄한 죽음의 책임을 개인이 떠안는 걸 당연하게 여겨선 안 된다. 의료·돌봄 시스템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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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선 논설위원 moonsun@hankookilbo.com
김지우 사원 dearzw@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