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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누리면 될 뿐… 황혼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네

동아일보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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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를 영화로 읊다] 〈121〉 석양이 아름다운 이유(下)
조선시대 최립(崔岦)은 화가 이정(李楨)에게 가을 풍경을 그리게 하며, ‘왜 아름다운 광경은 모두 저물녘에 모여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그는 “석양이 한없이 좋지만, 다만 황혼이 가깝구나(夕陽無限好, 只是近黃昏)”란 시구를 떠올리며, 석양빛 물드는 황혼의 정경이 즐거우면서도 서글픈 느낌을 자아낸다고 적었다(‘散畫識’). 당나라 이상은의 이 시구(‘樂遊’)는 조선 시인 권필(權韠·1569∼1612)에 의해 다음과 같이 재해석되기도 했다.


시인이 윤경망(尹景望)을 위해 해장(海莊) 주변의 여덟 곳의 명승을 읊은 ‘해장팔영(海莊八詠)’ 중 한 수다. 한시에선 뛰어난 경치를 여덟 가지로 읊곤 했는데 이 작품도 그런 전통을 잇고 있다. 시에서 포착한 아름다운 정경은 최립이 말한 것처럼 저물녘 낙조다. 하지만 시인은 이상은의 시구를 떠올리면서도 그 의미를 뒤집어 황혼이 오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석양의 아름다움을 즐기라고 썼다.

영화 ‘리빙: 어떤 인생’에선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주인공이 눈 오는 밤 홀로 그네를 타며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티캐스트제공

영화 ‘리빙: 어떤 인생’에선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주인공이 눈 오는 밤 홀로 그네를 타며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티캐스트제공


지난 회에서 이상은의 이 시구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로 소개한 ‘이키루’(1952년) 역시 올리버 허머너스 감독이 ‘리빙: 어떤 인생’(2022년)에서 재해석한 바 있다. 각본을 맡은 노벨상 수상 작가 이시구로 가즈오는 공간을 영국으로 바꾸어 원작을 색다르게 변주한다. 시청 공무원으로서 무미건조한 삶을 살던 주인공 윌리엄스는 말기 암 진단을 받은 뒤 마지막을 의미 있게 보내기로 결심한다. 윌리엄스는 자신이 몸담은 관료 조직의 타성과 비효율성에 맞서 지역민의 숙원이었던 어린이 놀이터를 건설하는 데 진력하다 죽음을 맞는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죽기 직전 놀이터에서 홀로 그네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원작의 ‘곤돌라의 노래’가 내일이 없는 짧은 삶에 대한 자각을 담고 있는 반면, 리메이크 영화의 ‘마가목(The Rowan Tree)’이란 노래는 유한성의 자각을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들과 연결시킨다.

시인이 이 시를 쓴 배경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원시와 달리 황혼을 걱정하기보다 석양의 아름다움에 집중하려는 의지가 드러난다. 현대 일부 학자들은 이상은의 시구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탄식이 아니라 그 짧은 시간 속에서 더 큰 아름다움을 발견한 감탄으로 해석하는데(120회 참조), 이 시의 의식과도 잇닿아 있다. 영화 또한 원작의 격정적 자기 연민과 달리 담담하게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는 주인공의 태도를 부각시킨다.

올해도 어느새 끝이 가까워지고 있다. 한시에서 황혼은 노년만이 아니라 한 해가 저물어가는 걸 나타내기도 한다. 시와 영화처럼,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아쉬워하기보다 남은 시간을 아름답게 채워가야 할 때가 아닐까.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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