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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근의 퍼스펙티브] 정치 의도 배제하고 공론화 거쳐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중앙일보 정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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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위한 사법 개편이 되려면



정철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정철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우리나라 대법원 판결의 심리는 대부분 10초 안에 끝난다.”

박시환 전 대법관은 2016년 『대법원 상고사건 처리의 실제 모습과 문제점』이란 논문에서 대법원의 재판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박 전 대법관은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11월 임명해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11월까지 6년 동안 대법관을 지냈다. 이명박 정부 때는 대법원 내 진보 대법관들을 일컫는 이른바 ‘독수리 5형제’의 일원으로 소수의견을 많이 냈다.



여당 추진 대법관 12명 증원 안은

하급심 부실, 재판 장기화 부작용


심사 거쳐 대법원 사건 수 줄이고

정권마다 4명씩 증원이 합리적

증원 대법관 편향적 물갈이하면


정치 예속돼 사법 신뢰 무너질 것

‘포스트잇’으로 갈리는 상고심의 운명

박 전 대법관이 ‘10초 판결’로 표현한 과정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우리나라 대법원 재판업무는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12명의 대법관이 맡는다. 대법관 4명씩 3개의 소부로 나눠 상고심 재판을 진행한다. 수만 건의 상고심 사건 중 전원합의체에 넘어가는 0.1%를 제외한 대부분(99.9%)은 소부에서 처리한다. 대법관에는 재판연구관이 딸려있다. 특정 대법관에 소속된 전속연구관의 별칭은 ‘사노비’, 모든 대법관이 활용하는 공동연구관은 ‘공노비’로 불린다. 상고심 사건이 소부에 배당되면 공동연구관이 기록을 본 뒤 A4용지 10매 안팎의 보고서를 주심 대법관에게 올린다. 공동연구관들은 이때 ▶대법원이 본안 심리를 하지 않고 기각하는 심리 불속행 ▶간단한 기각사유를 설명한 상고기각 ▶대법원장까지 포함된 전원합의체 회부로 사건을 분류해 ‘포스트잇’에 의견을 써서 보고서 앞장에 붙인다. 상고심 사건 10건 중 9건은 ‘포스트잇’으로 재판의 운명이 결정된다. 주심 대법관의 검토가 끝나면 매달 두 번 소부 합의 회의가 열린다. 이때 각 대법관 한 명당 평균 100건씩 총 400건이 회의에 올려진다. 주심 대법관이 짧게 의견을 말하면 나머지 3명은 10초 동안 침묵한다. 그 10초 동안 다른 의견을 내지 않으면 그 사건의 대법원 판결은 끝난다. 박 전 대법관은 “전원합의체에서 판결하는 사건은 전체 상고심의 0.1%나 될까. 나머지는 택배사 집하장의 짐짝 취급을 면치 못한다”고 폭로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0월 20일 법원조직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대법관 수를 현행 14명에서 26명으로 증원하고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24명 중 각 12명씩 1·2 연합부로 구성한다는 게 핵심이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민주당은 “대법관 1인당 연간 약 5000건에 달하는 사건을 처리해야 할 정도로 업무가 과중해 심층적 심리가 어렵고, 상당수 사건이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종결되는 구조로 국민의 상고심 신뢰가 저하된다”고 사유를 들었다.

민주당은 또 사실상 4심제를 뜻하는 재판소원제도 추진하고 있다. 대법원의 확정판결도 재판소원을 하면 헌재에서 다시 심리하겠다는 것이다.

상고심 줄지만 하급심 불복률 높아져

“최근 하급법원 판결에 오판율이 높아지고 있고 상고사건의 3할이 파기되는 실정이다. 이는 인권이 막대한 침해를 당하고 하급심 판결에 불신의 정도가 높아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급심 판결의 질을 향상하라’는 1958년 1월 14일 자 경향신문 사설이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부터 대법원의 업무 과부하가 문제가 됐으며, 그 주요 원인이 하급심 부실이었다는 얘기다.

1990년대 법원을 출입할 때 공소장에 판결 취지를 볼펜으로 몇 줄 적어놓은 판결문을 자주 목격했다. 판결 취지가 72자에 불과한 민사단독 판결문이 논란이 된 적도 있다.

하급심 불복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민사사건 항소율은 20년 전 40% 미만에서 2023년 48.1%로 높아졌다. 형사사건 역시 2000년대 중반 43% 수준에서 2020년대 들어 50%까지 높아졌다. 반면 상고율은 20년 전 40%에서 30% 미만대로 줄었다. 따라서 법관의 업무 부담을 따져 증원한다면 부하가 낮아진 대법원보다 불복 비율이 높은 하급심 위주로 늘리는 게 맞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상고심을 재판하는 대법관을 두배로 늘린다고 ‘10초 판결’이 사라질까. 상고제도를 개선하지 않으면 ‘10초 판결’이 ‘20초 판결’로 바뀔 뿐이다.

재판이 지연되는 것도 큰 문제다. 지방법원에서 대법원까지 평균 3년이 걸린다. 재판소원까지 도입되면 국민은 평균 5년 이상 재판에 매달려야 한다. 재판 기간이 길어질수록 돈과 힘이 있는 사람이 유리해진다. 반대로 돈 없고 배경 없는 보통사람은 대법원의 ‘10초 판결’이 억울해 재판소원을 걸어도 헌재에서 뜯어보지도 않고 버려지는 우편물 취급을 당할 것이다.

집권당이 막은 루스벨트의 ‘코트 패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 중 한명이다. 1936년 61%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한 루스벨트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뉴딜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연방대법원에서 뉴딜정책 법률안을 줄줄이 막았다. 루스벨트는 종신 임기인 대법관의 나이가 70세6개월을 넘으면 대통령이 추가로 임명할 수 있도록 하는 대법관 증원 안을 냈다. 억지로 쑤셔 넣는다는 뜻의 이른바 ‘코트 패킹(Court Packing)’을 시도한 것이다. 루스벨트는 상·하원을 장악하고 있으니 쉽게 통과될 줄 알았다. 하지만 공화당과 언론은 물론 민주당 내의 반발에 부닥쳤다. 루스벨트의 측근인 와이오밍주 상원의원 조지프 오마호니마저 “지금 지독한 마키아벨리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결국 대법관 증원 안은 무산됐고 루스벨트는 중간선거에서 상·하원 모두 의석을 잃었다.

올해 노벨 평화상은 수상을 간절히 원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아니라 베네수엘라의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2023년 야권통합 예비선거에서 90% 넘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하지만 이듬해 대법원에서 15년간 공직 출마 금지 결정이 내려져 대선 출마가 막혔다. 대법원은 “외국 정부와 공모해 베네수엘라에 경제적 손실을 입혔다”는 이유를 들었다. 마차도는 “차베스의 석유기업 국유화 조치 등 사회주의 정책이 베네수엘라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했다”며 “국유기업을 다시 민간에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우고 차베스는 1999년 대통령 취임 후 헌법을 개정하고 대법관 수를 20명에서 32명으로 늘렸다. 추가된 12명은 모두 친정부 인사로 채웠다. 차베스가 내건 명분은 사건 적체를 해소하고 국민의 사법 접근성을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의회가 대법관의 임명 동의요건을 기존 3분의 2 이상에서 과반수로 낮춰 사법부를 행정부의 하위기관으로 종속시켰다. 선거를 둘러싼 공정성 논란도, 야권 탄압도 사법부의 판결에 의해 정당화됐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은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투표장에서 붕괴한다”고 경고했다. 이들은 포퓰리즘과 손잡고 의회 권력을 장악한 정치세력이 사법부까지 손에 넣으면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9일부터 11일까지 법원이 주최한 ‘국민을 위한 사법 개편 공청회’를 3일 내내 참관했다. 진보성향 김선수 전 대법관과 조재연 전 대법관, 윤석열 전 대통령 만장일치 파면 결정을 이끌어낸 문형배 전 헌재소장 대행 등 법조계 거물들이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 대다수는 “사법부 개편은 필요하나 공론화 과정을 거쳐 신중하고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4명씩 단계적으로 증원하면 정치적 편향성, 재판연구관 부족, 하급심 부실 문제 등이 완화될 수 있다는 합리적 대안도 나왔다. 법조인들이라 입장이 달라도 법적, 제도적 근거를 갖고 토론했다. 하지만 막강 여당이 밀어붙일 경우 사법부가 이를 감당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마지막 토론이 끝나고 방청객 질의응답 시간에 이용우 전 대법관이 사법시험 2회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준비한 글을 낭독했다. 이 전 대법관의 말은 떨렸지만 또렷하게 울렸고 장내는 숙연해졌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법부가 나아가야 할 길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온갖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사법부 독립을 꿋꿋하게 지켜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수호해야 합니다.”

정철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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