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영 경제선임기자 |
지난 9일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질문으로 장관들의 주거 복지가 논의됐다. 너도나도 관사가 없다고 손을 들었다. 법무부 장관은 집이 멀어서 법무부 비용으로 오피스텔을 얻었지만 보안이나 안전이 취약하다고 하소연했다. 경제부총리는 안보 부처인 국방·외교 장관에게 관사가 마련돼 있고 나머지는 없다고 설명했다.
■
장관 공관 챙기는 이 대통령 인식
미·영·프는 대개 장관 공관 없어
국민 세금 쓰는 철학·기준 있어야
수십년간 봐온 터라 장관 공관을 으레 당연하다고 여기기 쉽지만 많은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미국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대통령과 부통령, 단 두 명만 관저가 있다. 장관에게는 관저를 제공하지 않는다. 위기나 비상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국방·국무장관도 예외가 아니다.
장관에 임명되면 사비로 워싱턴DC나 인근에 거처를 마련한다. 세를 얻거나 집을 사서 이사도 한다. 각자 형편과 생활 방식에 따른다. 군 기지 안에 있는 군용 관사를 사용할 수는 있다. 이 경우 월세를 사비로 내야 한다. 최근 국토안보장관이 해안경비대 사령관 관저에 무상으로 입주한 사실이 언론 보도로 드러나 질타를 받았다.
대통령직 승계 서열 1위인 부통령이 관저를 얻은 지도 얼마 안 됐다. 부통령들은 1789년 이후 188년간 개인 집에 거주하다가 1977년 처음 공관에 입주했다. 4년 또는 8년마다 사저에 통신보안 장치와 경호시설을 설치하고 해체하기를 반복하는 데 드는 비용이 커지자 차라리 관저가 예산 절감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의회 입법을 통해 마련됐다.
미국이 관저에 인색한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영국 왕실로부터 독립해 탄생한 미국은 고위공직자들이 ‘왕실처럼’ 살아서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다. 관직을 이유로 거처를 제공하는 건 왕정을 연상케 한다. 미국 정치는 특히 세금 사용과 남용 감시에 엄격하다. 장관들이 충분한 급여를 받기 때문에 주거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도 있다. 엘리트주의의 배격이다. 외빈 접견과 만찬 같은 공식 행사는 각 청사 내 잘 꾸며진 연회장과 영빈관이 공관 이상의 역할을 한다.
영국·프랑스·일본 등도 국가 수반인 대통령과 총리 중심으로 관저 제도가 있고, 역사적 의미를 갖는 장관급 관저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장관의 거처는 사적 영역으로 남아있다. 장관 관사는 국제적 표준이라기보다 예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한 나라의 예산 지출은 그 나라의 철학을 반영한다. 미국 제도는 비교적 검소하게 설계돼 있다. 미국 정치인들은 세금이나 예산이란 단어 대신 ‘납세자의 돈’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세금’은 납세자의 손을 떠나 정부에 귀속된 정부 자산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정부가 주인 같다. 반면에 ‘납세자의 돈’은 세금이 누구로부터 나온 것인지, 그 출처를 좀 더 명확히 한다. 국민의 돈을 위임받은 위정자가 인심 쓰듯 써도 되는 돈이 아니라는 의미가 강조된다.
최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이 백악관 국무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해외원조 개혁 과제를 설명할 때도 이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건 우리 돈이 아니다. 이건 납세자의 돈이다. 우리는 해외 원조를 할 것이지만, 미국을 지지하는 나라를 위한, 납세자의 돈을 낭비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외 원조를 할 것이다.”
관사는 사소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국가 예산 철학을 드러낸다. 정부 지출은 점점 비대해져 내년도 예산은 728조원에 이른다. 나랏빚도 늘고 있다. 정부는 예산의 상당 부분을 세금으로 충당하려 한다. 납세자의 돈을 사용하는 방식에 관한 선택과 집중이 더욱 필요해졌다. 국가 예산으로 제공해야 할 명확한 공적 기준이 없는 데도 단순히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재정을 투입하는 게 옳은가 생각하게 된다.
이 대통령은 장관 관저가 어느 부처 소관인지 물은 뒤 “행안부에서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주요 선진국 실태도 함께 살펴보기 바란다. 특정 국가를 따라 하자는 게 아니다. 가능하지도 않다. 국민 눈높이가 글로벌 수준이기 때문에 정책 눈높이도 그에 맞추자는 취지다. 우리 예산 철학을 정립할 필요도 있다.
관련 기사에 붙은 댓글이 기억에 남는다. ‘공관 없는 장관이 중헌가, 집 없고 사글세 사는 국민이 중헌가?’ 적지 않은 국민이 긴 시간을 통근에 쓴다. 자비로 직장 근처에 거처를 구하기도 한다. 기사 딸린 관용차를 타고 유류비까지 지원받는 장관들은 이미 국민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 국민이 낸 세금을 불필요한 데 허투루 쓰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민생이다.
박현영 경제선임기자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