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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 가득 연말, 술자리 대신 도서관에서 밤새우자고? [요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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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된 여행. 이한호 한국일보 여행 담당 기자가 일상에 영감을 주는 요즘 여행을 소개합니다.


경기 파주시 파주출판도시 지혜의 숲 서고에 책이 까마득히 높게 쌓여 있다.

경기 파주시 파주출판도시 지혜의 숲 서고에 책이 까마득히 높게 쌓여 있다.


경기 파주시 파주출판도시 지혜의 숲을 찾은 방문객들이 책을 고르고 있다.

경기 파주시 파주출판도시 지혜의 숲을 찾은 방문객들이 책을 고르고 있다.


한 권의 책에는 하나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표지를 들춰 첫 장을 읽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원래 몸담은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에 다녀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천, 수만 권의 책이 모인 도서관은 수많은 세계를 잇는 관문이자 갈림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번잡하고 바쁜 연말에 조용히 도서관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연이은 송년 모임에 지친 심신에 잠시라도 휴식을 선물하는 자구책인 셈이다.

보다 온전히 휴식 세계로 떠나고 싶다면 도서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라이브러리(도서관) 스테이’를 권해봄 직하다. 속세를 떠나 사찰에서 ‘템플 스테이’를 하듯, 하루만큼은 도서관에서 심신을 달래는 것이다. 라이브러리 스테이가 첫선을 보인 지는 10년도 넘었지만, 책으로 대표되는 아날로그 활자 매체를 찬미하는 ‘텍스트힙’ 문화에 힘입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라이브러리 스테이를 처음 도입한 국내 책문화 중심지 파주출판도시를 찾았다.

라이브러리 스테이의 원조 '지지향'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지지향 객실 내부 모습.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지지향 객실 내부 모습.


라이브러리 스테이 지지향에는 객실마다 다른 주제의 책이 비치돼 있다.

라이브러리 스테이 지지향에는 객실마다 다른 주제의 책이 비치돼 있다.


출판 특화 국가산업단지로 기획된 파주출판도시는 책에 의한, 책을 위한 마을이다. 480만㎡ 규모에 200여 동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출판사와 헌책방 등이 입주해 있다. 라이브러리 스테이의 발상지가 이곳에 있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출판도시의 핵심 건물인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에 위치한 ‘지지향(紙之鄕)’이다. ‘종이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지혜의 숲’ 도서관 위에 지어진 숙박시설이다.

지지향은 투숙객으로 하여금 ‘책과 온전한 하루’를 보내도록 유도한다. 입실하는 순간부터 이를 느낄 수 있다. 동네 여관부터 5성급 호텔까지 빠지지 않는 TV가 객실에 없다. TV 대신 독서를 할 수 있는 책상과 책장이 있다. 우주, 과학, 위인전 등 객실마다 다른 주제로 구성된 책 꾸러미가 비치돼 있다. 기자가 투숙한 객실은 ‘웰니스’ 주제 도서가 비치돼 있었다. 관심 분야가 아니었지만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라이브러리 스테이의 핵심은 도서관이 아닌가.

지혜의 숲에 들어서면 거대한 서고에 압도당하는 기분이다.

지혜의 숲에 들어서면 거대한 서고에 압도당하는 기분이다.


지혜의 숲 2관에 여원미디어, 풀과바람, 북스토리 등 출판사가 기증한 도서가 진열돼 있다.

지혜의 숲 2관에 여원미디어, 풀과바람, 북스토리 등 출판사가 기증한 도서가 진열돼 있다.


독서를 하며 휴가를 보내는 ‘북스테이’와 라이브러리 스테이의 차이점은 바로 도서관의 유무다. 무거운 책을 짐가방에 챙기지 않아도 되고 새로운 책들을 느긋하게 둘러볼 수 있다. ‘도서관에서 밤을 보낸다’라는 낯선 행위가 익숙한 독서에도 설렘을 느끼게 한다.

객실 문을 열면 바로 도서관이 보인다. 도서관 책장 높이가 8m에 달해 일부 공간의 천장은 객실이 있는 4층에 닿는다. 층계 몇 단 내려가면 방대한 도서관 ‘지혜의 숲’이 기다린다. 천장 끝까지 쌓인 책의 위용이 방문객을 압도한다. 도서관에 20만여 권의 장서가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일반 방문객은 도서관 내에서만 책을 이용할 수 있지만 라이브러리 스테이 투숙객은 책을 대출해 객실로 가져갈 수 있다.


지혜의 숲 장서는 기증도서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여느 도서관과 달리 장서가 기증자별로 분류돼 있다. 처음에는 다소 불편하다 생각될 수 있지만 오히려 덕분에 책 한 권 한 권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늘 보던, 내가 원하는 책만 빠르게 집어 들고 책장에서 멀어지는 일련의 과정조차 심신의 휴식을 방해하는 ‘효율적 세계’의 일부일지 모른다. 평소의 독서 편식을 벗어나 독서 지평을 넓힐 기회다. 시간을 들여 수만 권의 장서를 보고 있자면 개인 기증자는 물론 출판사별 취향과 특색이 눈에 들어온다. 책을 펼치기도 전에 책에서 무언가를 읽어낸 셈이다. 이날 서고를 오가며 책을 고르는 데만 꼬박 두 시간을 썼다.

지혜의 숲 1관에 고 석경징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기증한 도서가 진열돼 있다.

지혜의 숲 1관에 고 석경징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기증한 도서가 진열돼 있다.


지지향과 문발살롱의 '정석'은 향이 좋은 와인과 양질의 도서를 느긋하게 음미하는 것이다.

지지향과 문발살롱의 '정석'은 향이 좋은 와인과 양질의 도서를 느긋하게 음미하는 것이다.


도서관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지혜의 숲 1관은 학자, 지식인, 연구소의 애장서가 보관돼 있다. 평생 진리를 탐구한 이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1관 도서만큼은 투숙객도 도서관에서만 이용할 수 있다. 2관은 가장 넓은 구역으로 출판사에서 직접 기부받은 도서로 구성돼 있다. 출판사별 선호 콘텐츠, 편집 방향, 역사가 드러난다. 학술서 위주인 1관과 달리 아동도서 구역도 마련돼 있어 전 연령대가 두루 이용하기 좋다.

3관은 ‘문발살롱’으로 지지향의 로비 역할도 수행한다. 출판사, 유통사, 박물관, 미술관 등 다양한 기관 기증서가 비치돼 있다. 최신 도서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내부에 다양한 원두의 커피와 와인을 취급하는 카페가 있다. 낮에는 커피, 밤에는 와인 한 잔이 독서에 향과 맛을 더한다. 1·2관은 오후 8시면 문을 닫지만 3관은 투숙객 한정으로 24시간 열려 있다. 인파가 뜸해진 저녁 와인 한 잔과 책을 음미하는 것은 라이브러리 스테이의 필수코스. 편한 객실에서 독서를 이어가고 싶은 투숙객에게 와인잔도 대여해 준다.

책마을 곳곳 숨은 책공간들



파주출판도시 활판인쇄박물관 활자의 숲.

파주출판도시 활판인쇄박물관 활자의 숲.


밤새 독서 삼매경을 마쳤다면 출판도시 곳곳에 숨은 책공간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지지향과 지혜의 숲이 자리한 건물 지하에는 활판인쇄박물관이 있다. 세계 최고의 역사를 가진 우리 활판인쇄술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출판·인쇄인들이 세웠다. 전날 읽은 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려주는 공간이다. 라이브러리 스테이 후 첫 방문지로 들르기 좋은 곳이다.

도서관이 지혜의 숲을 표방한다면 박물관은 활자의 숲을 표방한다.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건물 2, 3층 높이로 쌓인 활자에 둘러싸인다. 총 25톤, 3,500만 자의 활자로 조림한 숲이다. 숙련된 주조공이 50년을 쉬지 않고 일해야 만들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활자는 물론 지도 도화기, 지폐 채문 조각기 등 특수인쇄 장비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박물관의 전시품은 어느 하나 사연 없는 것이 없다. 활자, 자모, 주조기는 국내 마지막 활자 제조공장 전북 전주시 ‘제일활자’에서 사용하던 물품이다. 1963년부터 2016년까지 호남, 충청, 경인 지역 인쇄소에 활자를 공급하던 터줏대감이었다. 2016년 파주로 거점을 옮기며 박물관에 활자를 넘겼다. 파주로 설비를 옮기던 마지막 날까지도 오랜 거래처 인쇄인들이 공장을 찾아 활자를 받아 갔다고 한다.


3.1독립선언문을 활판으로 찍어낸 '보성사'가 활판인쇄박물관 내에 복원돼 있다.

3.1독립선언문을 활판으로 찍어낸 '보성사'가 활판인쇄박물관 내에 복원돼 있다.


활판인쇄박물관에 전시된 활자.

활판인쇄박물관에 전시된 활자.


활판인쇄기와 재단기는 대구 봉진인쇄소에서 활약했다. 박물관 내 인쇄기 전시관이 ‘봉진인쇄’로 명명된 배경이다. 역시 2016년까지 인쇄물을 찍어내다 인쇄소가 문을 닫으며 파주 박물관에서 맥을 잇고 있다. 제본기 등 여러 장비는 충무로와 광주 일대 인쇄소를 샅샅이 뒤져 공수했다. 전주, 대구, 서울 등 전국 방방곡곡 활자의 역사가 파주에서 한데 모인 것이다.

활자를 활용해 나만의 소품을 만드는 체험형 프로그램도 다수 마련돼 있다. 책갈피, 엽서부터 동물 그림책, 명시집까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장품을 인쇄할 수 있다.

부산의 옛 책방골목을 재현한 문발리헌책방골목 블루박스.

부산의 옛 책방골목을 재현한 문발리헌책방골목 블루박스.


아동 서적 전문 매장 밀크북.

아동 서적 전문 매장 밀크북.


독특한 콘셉트의 헌책방도 빼놓을 수 없다. ‘문발리헌책방골목 블루박스’는 1950, 60년대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을 재현한 내부 공간으로 입소문을 탔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나무기둥, 골목길 가로등에 태연히 헌책이 둘려 있다. 때로는 책장이 움푹 파여 한두 명의 사람이 앉아 독서할 수 있는 ‘굴’을 만들기도 한다. 반층 단위를 오가는 층계, 실외 골목 같은 내부 경관, 아늑한 분위기가 재미있는 공간 경험을 제공한다. 한번 발을 들이면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공간이다. 카페를 겸하고 있어 책을 구매하지 않아도 음료를 마시며 편히 책을 읽을 수 있다.

아동서적 전문 헌책방 ‘밀크북’은 화사한 분위기로 방문객을 반긴다. 어린이 영화 상영, 레고·블록 대여, 과학상자 대여 등 아동 대상 프로그램과 전용 놀이공간이 준비돼 있다. 그러나 성인 방문객도 충분히 빠져들 공간이다. 내부 서고를 둘러보다 보면 ‘마법 천자문’ ‘그리스 로마 신화’ ‘먼나라 이웃나라’와 같이 현재 2030세대가 어릴 적 탐독했던 추억의 서적이 산재해 있다. 책을 매개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추억의 책방이다.

물과 산 사이에 위치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물과 산 사이에 위치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백색 곡선 조형이 인상적인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백색 곡선 조형이 인상적인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파주출판도시는 기획 초기부터 획일화된 건축을 지양하고 심미성을 고려했다. 덕분에 단지가 거대한 건축 미술관과 같아 떠나는 길마저 숨은 ‘작품’을 찾는 재미로 채울 수 있다. 라이브러리 스테이 장소인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만 해도 주위 자연과 건축을 훌륭히 조화시켜 2004년 김수근 건축문화상을 수상했다. 심학산 자락과 갈대샛강을 잇는 건물의 위치와 전망은 지상도시 같기도, 수중도시 같기도 하다. 붉은 강판, 노출콘크리트, 목재는 시시각각 변하는 계절과 어우러져 자연미를 강조했다는 평이다.

백색 곡면이 특징적인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도 출판도시의 랜드스케이로 꼽힌다. 유연한 각도의 건물 외벽은 전시관 내부에 자연광을 유도할 의도로 설계됐다. 포르투갈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알바루 시자 비에이라의 작품이다.

글·사진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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