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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의 공평한 어리석음]낡은 문장에서 해방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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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이 내 뜻 같지 않을 때 나는 흐릿한 미래보다는 제법 선명해 보이는 과거를 돌이켜 보곤 한다. 저렇게 또렷한 옛길도 많은 사람들이 수상한 안개를 뚫고 수고스럽게 걸어 온 덕분에 생겼다. 지금 당연한 것이 과거에는 격렬한 의심의 대상이었다는 점을 알게 되면, 가망 없이 갈라져 가는 오늘을 낙관할 힘이 불쑥 솟아나곤 한다. 그래서 오래된 문장이 그럴듯한 새 옷을 입고 우리 주위를 배회할 때면 나는 오히려 반갑다. 나아갈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월을 거슬러 가보자. 19세기 영국 의회는 아동노동을 제한하기 위해 연일 논쟁을 벌였다. 찬반 진영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때 아동노동이 불가피하다고 한 사람들은 짧고 강력한 문장을 하나 제시했다. “아동노동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아이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것은 누군가의 잔혹함 때문이 아니라 가난 때문이라는 것이다. 얼핏 그럴듯한 주장은 곧바로 아동노동의 규제나 철폐는 가족을 더 깊은 빈곤 속으로 밀어넣을 뿐이라는 논리로 연결되었다.

이 문장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문장도 있었다. “노동이 복지이자 보호다.” 아이들을 일터에서 떼어내면 그들은 방치되고 타락할 것이기 때문에 아동노동은 착취가 아니라 훈육이고 사회로 편입되는 통로라는 설명이었다. 학교는 부족했고 복지는 없었으며 방치는 실제로 위험했었던 사정에 대한 이런 ‘사실주의적’ 묘사는 곧 아동노동이 가장 현실적인 차선이라는 주장으로 둔갑했다. 아이들을 위하는 말처럼 들리는 문장은 정작 아동의 복지와 보호에 침묵했다.

또 하나의 문장이 더해졌다. “국가는 가정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 아이의 노동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사적 영역이므로 국가는 그 사이에 끼어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노동과 일터는 ‘외부세력’이 사사로이 개입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시장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이 등장하는 순간, 논쟁은 노동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가 되었다. 아이는 사라지고, 금시초문의 권리가 등장했다. 자유는 실체를 잃고 모호할 때 지배의 언설이 된다. 이 세 문장은 묘하게 잘 맞물렸다. 가난을 말하고, 보호를 말하고, 자유를 말한다. 어느 하나도 틀린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성실했고 현실적이었다. 그 문장들을 말하는 이들 역시 스스로를 냉혹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지금 당장 가능한 것”을 말하고 있을 뿐, 감정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을 망친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흘러, 우리는 아동노동이 없는 사회에 마침내 합의했다. 치열하고 질기게 같이한 싸움 덕분이었다. 학교가 생기고 보호가 확장되어, 아이는 학교를 가고 어른은 일터로 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 문장들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문장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떠받치던 ‘현실’을 사람들이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쉽게 방심하고 이런 낡아버린 문장은 시대에 맞게 변주되어 나타난다. 노동시간을 줄이자고 할 때, 최소한의 임금을 말할 때, 일터의 폭력과 차별을 없애자고 할 때, 말해져야 할 것에 목소리를 주려 할 때마다, 낡은 문장들은 능청스럽게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논쟁들을 볼 때 누가 옳은지를 묻기 전에 어떤 문장이 호출되고 있는지를 살핀다. 오래 살아남은 문장일수록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의심받지 않는 형태로 우리를 설득한다.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이 문장은, 어쩔 수 없는 것을 바꾸는 불편을 우리에게서 슬그머니 치워준다. 그리고 그 문장들이 요구하는 비용에 대해 묻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문장들이 거의 언제나 옳아 보인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반박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문장에 동의하기보다, 그 문장이 요구하는 조건을 묻지 않게 된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늘 익숙한 침묵이 남는다. 힘 있는 사람들은 이 문장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사랑은 낡은 문장들에 새로운 권위를 부여한다.

진보라는 것은 더 똑똑해지는 데서 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판단의 무게를 조금 덜 영리하게, 조금 더 고르게 나누는 데서 시작된다. 언제나 같은 사람이 감당하던 계산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일.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불리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수고로운 시간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수고로움이 꼭 어쩔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낡은 문장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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