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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째 자살률 1위…또 한해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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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예원

일러스트레이션 김예원


나종호



“우리나라 자살률이 왜 이리 높나요?”



대통령이 공개 국무회의에서 질문을 던진 지 6개월이 지났다. 새로 취임한 국가 최고 지도자가 공개석상에서 한국의 자살 문제를 정면으로 언급한 만큼 ‘이번에는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자살은 더 이상 개인의 비극으로만 치부될 수 없는, ‘국가가 책임지고 다루어야 할 공중보건 문제’라는 인식이 마침내 반영될 것이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6개월이 흐른 지금, 그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정책의 방향성은 보이지 않고, 실행의 속도는 더디며, 책임의 주체도 불명확하다. 이대로라면 2026년 또한 2025년과 큰 차이 없는 한해를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안타깝고 절박한 마음으로, 올해의 마지막 칼럼을 이 주제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안은 지 2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 긴 시간 동안, 어떠한 정권도 제대로 된 대응을 했다고 보기 힘들다. 심지어 10여년 전, 우리의 높아진 자살률을 우려한 오이시디 자문단이 방한하여 정신건강 인프라 확장을 요구했지만, 이에 대한 정책적 변화는 뒤따르지 않았다. 보다 못한 시민들이 최근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며, ‘명대로 삽시다’라는 자발적인 시민운동을 시작했지만, 제도와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는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정치권의 관심은 일시적인 언급에 그치고, 실제적인 정책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자살률이 높은 이유를 ‘사회 구조적 문제’로만 설명하며, 경제가 좋아지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면 자연스럽게 자살률도 낮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일견 타당해 보이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전세계 어디에서도 정신건강 인프라를 구축하지 않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채, 자살률이 저절로 의미 있게 감소한 사례는 없다. 반대로, 국가가 직접 나서서 장기적·체계적으로 자살 예방 정책에 투자한 나라들(핀란드, 일본, 영국 등등)은 예외 없이 성과를 냈다.



일본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한때 한국 자살률의 2배 이상을 기록하며 1980~90년대까지 자살 공화국이라 불리던 일본은 2006년, 총리와 국회의 주도로 자살 예방을 국가 핵심 과제로 설정하고 대대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응급정신건강체계 구축과 지역사회 기반의 정신건강체계 확충, 미디어 보도 가이드라인 강화, 과로사·실업·채무 문제에 대한 조기 개입,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명확한 역할 분담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일본의 자살률은 지난 20년간 약 40% 감소했고, 작년에는 1978년 이래 가장 낮은 자살률을 기록했다. 최근에는 청소년 자살률이 높아지자, 아동가족청을 신설하고, 지자체마다 다학제 응급정신건강 대응팀을 꾸렸다. 반면 한국이 자살 예방에 투입하는 예산은 일본 도쿄도 단일 지자체 자살 예방 예산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내년 자살 예방 예산은 28억원 증액되었으나, 절대 규모가 지나치게 작은 상황에서 이와 같은 소규모 증액으로는 자살률을 실질적으로 낮추기 어렵다.



얼마 전, 부모와 누나를 잃은 한 20대 청년이 소셜미디어(SNS)에 죽음을 암시하는 글을 올렸다가 수천명 네티즌의 위로와 신고 덕분에 구조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삭막하다고만 느껴지는 사회 속에서, 우리 사회에 여전히 살아 있는 연대와 선의를 확인하게 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런 ‘기적 같은 구조’는 국가의 부재를 대신할 수는 없다.



한국의 ‘109 자살 예방 상담 전화’를 실제로 받는 인력은 전국적으로 약 140명에 불과하다. 5천만명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국가 상담망의 규모라고는 믿기 어려운 숫자다. 그것도 불과 얼마 전까지는 100명으로 운영되다가, 지난 10월에야 40명이 증원되었다. 이와 같은 인력 부족으로 인해, 자살 위험이 가장 높은 밤 시간대에는 전화를 걸어도 응답받을 확률이 40%에 그친다. 24시간 자살 시도자를 돌보는 권역정신응급센터 또한 예산 부족으로 인력난에 시달린다. 도움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 도움을 받지 못하는 시스템을 두고, 과연 우리 정부는 자살 예방에 진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 발표된 오이시디 보고서는 자살 문제를 악화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정신건강 치료 환경의 취약성을 지적했다. 특히 한국은 정신 질환으로 입원한 환자가 퇴원한 뒤 1년 이내 자살로 사망할 위험이 비교 대상국 평균의 2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살 시도자 정보를 정신건강복지센터와 자살예방센터로 연계하도록 하는 법이 통과됐지만, 부족한 인력과 자원으로 인해, 많은 고위험군 환자들이 지역사회에서 지속적인 치료와 관리를 받지 못한 채 다시 위험 속에 방치되고 있다.



얼마 전 국회 자살 예방 포럼이 주최하는 ‘국회 자살 예방 대상’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내 심정은 착잡함에 가까웠다. 국회 자살 예방 포럼에 참여하는 국회의원은 32명, 전체 국회의원의 약 10%에 불과하다. 자살 문제가 여전히 정치의 중심 의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025년은 한국이 대외적으로 눈부신 성과를 거둔 해였다. 한류는 전세계 문화의 한 축이 되었고, 한국을 찾는 관광객 수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언급할 때 따라붙는 오래된 꼬리표는 여전히 ‘자살률 1위 국가’다. 경제적·문화적 성공과 국민의 생명 보호 사이의 이 극명한 대비는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한 나라의 자살률은, 그 나라를 이끄는 사람들이 국민의 생명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지표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약 2시간 동안에도 통계적으로는 3명가량의 국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자녀일 수도, 부모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이다.



보건복지부는 2029년까지 현재 10만명당 29.1명인 자살률을 19.4명으로 낮추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분명한 목표 설정과 책임 주체, 파격적인 정책과 예산 없이, 이 숫자를 달성할 가능성은 없다. 자살 예방을 국정의 핵심 과제로 격상시키고, 정신건강 및 자살 예방 예산과 인력을 지금보다 몇배로 확충하고, 자살예방청을 설립하여 실패했을 때 책임을 묻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오이시디 자살률 1위의 오명을 30년으로 연장할 것인가? 2026년의 끝에서 우리가 다시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 이 순간 국가가 답해야 한다.





나종호 | 미국 정신과 전문의이자 중독 정신과 전문의. 아픔을 고백하면 약점 잡기보다는 함께 공감해주고, 그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저서로는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만일 내가 그때 내 말을 들어줬더라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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