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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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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강 | 고려대 교수(행정학)



우리는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난다. 삶의 시작과 끝, 병들고 약해지는 모든 순간도 인간은 누군가의 돌봄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이처럼 돌봄은 우리 삶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다. 최근 정부와 정치권이 ‘국민돌봄’과 ‘돌봄국가책임’을 약속하며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는 개인과 가족이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돌봄의 무게를 이제는 국가가 함께 짊어지겠다는 공적 다짐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번쯤 냉철하게 질문해야 한다. ‘국가가 국민을 돌본다’는 약속이, 자칫 국민을 단순한 수혜자나 통제의 대상으로 다루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돌봄은 그 선한 의도만큼이나 권력관계에 얽혀 있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어서다.



무엇보다 돌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선의의 지배를 경계해야 한다. 돌봄은 흔히 사랑과 헌신으로 포장되지만, 그 이면에는 시혜와 통제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정치철학자 조앤 트론토가 지적했듯, ‘돌보겠다’라는 말은 자칫 상대를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권력자의 지배를 강화하는 온정주의로 흐를 수 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 부시 행정부가 ‘국민의 안전을 돌보겠다’는 명분 아래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부모가 보호를 명목으로 자녀의 삶을 간섭하듯, 국가 또한 국민 안전을 내세워 시민의 자율성을 손쉽게 침해할 위험이 크다.



또한 돌봄은 종종 우리와 남을 가르는 차별의 칼날이 되기도 한다. 특정 집단이나 지지층만을 내 식구로 챙기고, 나머지는 돌봄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는 배타적인 속성 때문이다. 이는 돌봄이라는 가치가 공동체의 경계를 가르고 타자에 대한 차별, 심지어는 극단적인 폭력까지 정당화하는 위험한 도구로 악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자국민에 대한 돌봄을 강조했을 때, 그 이면에는 이민자와 소수자에 대한 대규모 추방과 가차 없는 단속이 존재했다.



여기에 ‘돌봄은 본래 여성이 하는 일’이라는 가부장적 고정관념까지 결합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돌봄이 사회구성원 모두의 책임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결국 돌봄의 가치는 폄하되고, 이를 전담하는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부지불식간에 부식된다.



더 큰 문제는 돌봄이 선거철 정치인들의 화려한 수사로만 소비될 때 발생한다. 구체적인 재원 마련이나 실효성 있는 로드맵 없이 유권자의 감정을 자극하거나 정치적 이미지를 포장하는 데만 돌봄이 악용되는 것이다. 이처럼 국가가 다 책임지겠다는 공허한 선언만 남발하는 행태를 돌봄윤리학자 모리스 해밍턴은 ‘허위 돌봄’(false care)이라 명명했다. 해밍턴이 지적했듯, 실천이 결여된 채 이미지만 소비하는 돌봄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문제의식을 흐려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린다. 현장에서 고생하는 돌봄노동자들의 처우나 독박 돌봄에 지친 가족들의 고통은 그대로인데, 마치 ‘국가가 잘하고 있다’는 착시현상만 일으켜 진짜 위기를 은폐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제 돌봄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단지 돌봄의 총량만 늘리는 돌봄국가를 넘어, 돌봄에 민주적 가치를 불어넣는 돌봄‘민주’국가를 지향해야 한다. 돌봄민주주의란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가 수직적인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서로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우하며 상호존중과 협력을 실천하는 것이다. 나아가 돌봄이 낡은 위계와 성별 고정관념 속에 갇혀 미화되거나 착취되지 않도록, 이를 감시하고 바로잡을 제도적 장치 또한 마련되어야 한다.



진정한 돌봄은 국가가 일방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돌볼 것인지, 어떤 돌봄을 받고 싶은지, 우리 마을의 노인과 아이는 어떻게 함께 돌볼 것인지를 시민들이 직접 고민하고 결정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돌봄의 핵심이다. 돌봄이 특정 성별의 희생이나 국가의 시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당연한 권리이자 공동의 책임으로 제도화될 때 비로소 진정으로 국민을 민주적으로 상대하는 국가가 실현될 것이다.



결국 돌봄은 결핍을 채우는 행위를 넘어선다. 이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해체하고 모든 이의 존엄을 지켜내는 민주주의의 실천이어야 한다. 돌봄은 그저 듣기 좋은 정책 목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우리가 수행해야 할 민주적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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