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뉴스
서울
맑음 / -3.9 °
매일경제 언론사 이미지

[손현덕칼럼] 국수(國手), 명인(名人), 기선(棋仙)

매일경제 손현덕 기자(ubsohn@mk.co.kr)
원문보기
손현덕 주필

손현덕 주필


글깨나 쓴다는 사람조차 그 앞에선 주눅이 든다. 고(故) 김성동 작가. 한국 문단의 보배인 그는 말년에 '국수(國手)'라는 장편소설을 썼다. 제목이 말해주듯 당대 바둑 최고수를 통해 장인의 삶과 세상의 본질을 파고든다.

김성동에겐 바둑돌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같은 크기의 민초(民草)였다. 배려와 조화가 아닌 지배와 정복을 좇는 조선의 양반들 하는 꼴이 못마땅할 수밖에. 질타를 쏟아낸다. "사람 말 가운데 가장 알차고 맑은 것을 가리켜 시(詩)라고 하는 것이겠거늘, 간특한 자들이 시를 쓴답시고 붓방아질하고 있는 꼬락서니라니. 사모 쓴 놈치고 도적놈 아닌 놈 없는 세상"이라면서. 바둑은 인간과 인간 사는 세상을 비추는 알레고리였다. "한 수는 돌 하나가 아니라, 마음 하나" "판은 늘 정직하다. 거짓은 한 수도 버티지 못한다" 등등.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 '국수'는 주요 기전(棋戰) 우승자에게 따라붙는 명예였다. 조훈현 국수, 이창호 국수처럼. 일본으로 넘어간 바둑은 에도시대 막부가 후원하는 학문과 기예로 자리 잡았고 최고수에겐 명인(名人)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마지막 명인 슈사이(秀哉)와 도전자 간의 6개월에 걸쳐 치른 대국을 소설로 쓴 작가는 '설국(雪國)'으로 유명한 가와바타 야스나리. 제목이 '명인'이다. 침묵과 사유에 천착하는 명인에게 바둑은 품격과 소멸의 미학이었다. 명인은 마지막 대국을 치르면서 건강이 나빠져 대국 종료 1년 뒤인 한겨울에 숨을 거둔다. 비장감이 넘친다. 가와바타에게 그 대국은 장송곡이었다.

중국에서는 바둑 그 자체가 인생이고 수양이었다. 저장성 취저우에서 열리는 세계 바둑대회 중 란커배(爛柯盃)라는 게 있다. 나무꾼이 산에 갔다가 신선들의 바둑을 구경하다가 속세로 돌아와보니 세월이 한참이나 흘러 손에 든 도끼자루(柯)가 썩었다(爛)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바둑은 도(道)고, 인생은 찰나. 명(明)·청(淸) 시대로 오면서 정치의 은유로도 활용됐다. 바둑에서 말하는 형세, 국면 같은 용어는 모두 정치와 연결된다. 지난 10월 베이징에서 열린 제20기 공산당 4중전회에서 시진핑 주석은 정국 운영의 대원칙을 바둑에 비유하기도 했다. "전체 국면을 고려하는 좋은 바둑을 둬야 한다(下好全國一盤棋)"고.

바둑은 한국과 중국, 일본이 철학과 정서를 공유하는 문화의 장(場)이다. 승부를 겨루는 냉혹한 스포츠 게임 이전에 세상의 질서와 인간의 존재를 비추는 장치다. 바둑돌의 흑백(黑白)은 동양철학의 음양(陰陽)이며 가로 세로 19로(路)의 바둑판은 그 자체가 작은 우주다.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주고받는 선물로 바둑용품이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 10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때 이재명 대통령이 시 주석에게 준 선물은 800년 된 비자나무로 만든 바둑판이었다. 11년 전 시 주석 방한 때 준 바둑돌과 짝을 맞췄다. 우리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에게 받은 선물도 바둑돌과 통이었다. 이 대통령의 고향인 안동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가마쿠라에서 만든 제품.


바둑은 이렇게 한·중·일 3국을 잇는 가교다. 살기 넘치는 대국이지만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은 복기하고 생각을 공유하면서 우의를 다진다. 2003년 한·중·일 신예교류전을 마친 중국의 구리 9단은 다음 일정을 하루 미루고 저녁 만찬에 참석해 한국팀 선수들 전원과 술잔을 부딪치기도 했다. "대국보다 우정이 더 중요하다"면서.

바둑이 한·중·일 간 문화 교류의 촉매 역할을 계속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일경제는 신한은행 후원으로 우승상금 4억원을 내건 세계 최고의 바둑대회를 신설했다. 바둑의 정신을 담아내고자 대회 이름을 바둑의 신선을 가린다는 기선(棋仙)전으로 했다. AI가 압도하는 시대지만 신선처럼 멋진 수담(手談)을 나누길 바란다.

[손현덕 주필]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info icon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AI 이슈 트렌드

실시간
  1. 1LG 가스공사 3연승
    LG 가스공사 3연승
  2. 2트럼프 황금함대 한화 협력
    트럼프 황금함대 한화 협력
  3. 3주호영 필리버스터 거부
    주호영 필리버스터 거부
  4. 4윤석열 부친 묘지 철침
    윤석열 부친 묘지 철침
  5. 5통학버스 화물차 충돌사고
    통학버스 화물차 충돌사고

매일경제 하이라이트

파워링크

광고
링크등록

당신만의 뉴스 Pick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