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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수액에 대한 한국인의 기묘한 사랑

조선일보 박한슬 약사·‘숫자한국’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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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감기 기운으로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내과를 찾았다가 발길을 돌린 적이 있다. 대기실이 사람으로 넘쳐, 진료를 기다리다간 점심을 굶을 판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긴 원래 ‘수액 맛집’으로 통하는 곳이란다. 식당도 아닌 의원을 두고 맛집이라 칭하는 게 어폐가 있지만, 직장인들이 피로 회복을 위해 점심시간에 수액을 맞는 게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된 지 오래다. 직장 근처 병원 중에서 입소문 탄 곳도 나올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중장년층 이상에서 흔히 ‘링거’라 불리는 수액 요법은 원래 입으로 물과 음식을 삼킬 수 없는 환자에게 혈액으로 수분과 영양을 공급하는 차선(次善)으로 도입된 수단이다. 약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약은 투여 경로에 따라 안전성과 효과가 반비례한다. 알약을 삼키는 구강 투여는 가장 안전하지만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혈관에 꽂는 정맥 주사는 효과가 즉각적인 대신 위험 부담이 크다. 혈관으로 외부 물질을 직접 주입하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감염 위험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수액 전문 의원에서 터진 집단 C형 간염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선 영양 공급을 넘어 항산화 효과를 내세운 백옥주사나 비타민 B군을 농축한 마늘주사처럼 미용과 피로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기능성 수액을 맞는 일이 부쩍 늘었다. 우리에겐 꽤 익숙한 풍경이지만, 실은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정도에서만 유독 성행하는 독특한 문화다. 이들 국가가 인구 밀도가 높고, 의료 접근성이 높은 대도시를 잔뜩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국토가 넓어 병원 가기가 힘든 미국이나 호주에선 약사가 약국에서 백신을 접종할 정도다. 그러니 기능성 수액을 맞고 싶어도 부유층 외엔 애초에 선택지가 없다.

의료 인프라가 더 열악한 몽골 같은 국가는 의사 수를 무리하게 늘리는 정책을 폈다가 의사의 질적 저하만 초래했다. 표준화된 수련을 받지 못한 의사를 불신한 몽골인들이 아프면 무조건 수도 울란바토르(Ulaanbaatar)로 몰릴 정도다. 그런 몽골에서 수련받은 의사가 연예인들에게 불법 수액을 맞춰 주는 왕진을 다녔단다. 의료 접근성이 너무 높아 평범한 직장인도 쉽게 점심시간에 수액을 맞는 나라에서 구태여 수준 미달의 외국 의사를 데려다 주사를 맞을 이유가 뭘까. 좋은 게 너무 흔해지면 되레 무시당한다는 게 얄궂게 느껴진다.

[박한슬 약사·‘숫자한국’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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