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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포럼] 탈모와 생존 사이

매일경제 심윤희 기자(allegory@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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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희 논설위원

심윤희 논설위원


대한민국 중년 남성 셋 이상이 모이면 대화는 대체로 세 갈래 중 하나로 수렴한다. 주식, 골프 그리고 탈모다. "약값 한 달 치가 5만원이니 1년이면 60만원이더라" "튀르키예가 모발 이식 성지라는데 단체 관광이라도 갈까" 같은 말들이 오간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 속엔 은근한 절박함이 묻어 있다. 거울 앞에서 넓어지는 이마를 마주하는 당사자들에게 탈모는 분명 재난에 가까운 고통일 것이다.

이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내밀한 고민이 국정의 정중앙으로 소환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서 "탈모는 생존 문제"라며 탈모 치료제의 건강보험 급여 적용 검토를 지시한 이후 후폭풍이 거세다. 현재도 원형탈모나 항암치료로 인한 탈모 등 '질환성 탈모'는 건보가 적용된다. 논란의 핵심은 노화나 유전처럼 미용의 영역에 있는 탈모까지 건보 재정으로 막아주겠다는 데 있다.

1000만명으로 추산되는 탈모인은 환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다수의 시선은 서늘하다. 치료제가 있어도 급여 적용이 안 돼 치료를 포기하는, '진짜 생존'의 기로에 선 중증·희귀질환자들의 반발은 절박하다. 의료계도 "중증 환자 지원이 우선"이라며 반대 목소리를 높인다.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과 대란이 일상이 된 상황에서 '필수 의료'를 제치고 탈모가 국정 의제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지적이 잇따른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탈모가 대통령의 '디테일한 지시'가 되는 순간, 복지부의 행정 역량이 이 과제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정은경 복지부 장관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탈모 급여화가 재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밝혔다. 국민건강보험법은 생명 유지와 필수 기능 회복을 목적으로 한 치료에 급여를 우선 적용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통치권자가 공개석상에서 방향을 제시한 이상 공무원들은 법의 취지보다 '정치적 신호'를 먼저 해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건보 곳간의 건전성보다 대통령의 지시에 부응할 방안을 찾는 데 몰두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탈모약 급여화는 2022년 대선 당시 이 대통령의 '소확행' 공약으로 등장했지만, 포퓰리즘 논란 속에 이번 대선 공약에서는 빠졌던 사안이다. 집권 이후 다시 꺼내 들며 논쟁에 불을 지핀 셈이다. 이 대통령은 젊은 탈모인을 언급하며, 청년들이 건강보험료를 내고도 정작 의료비 혜택은 누리지 못한다는 점을 들었다. 탈모인 커뮤니티인 '대다모' 회원 수가 44만명을 넘고, 20·30대 비중이 60%까지 확대된 것을 보면 공감할 만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책은 공감만으로 결정될 수 없다.

결국 문제는 돈이다. 건보 재정은 이미 악화 일로다. 국회예산정책처는 건보 재정이 2026년 적자로 전환되고, 보험료 수입에서 지출을 빼고 쌓아둔 누적 준비금도 2030년 소진될 것으로 내다봤다. 탈모의 고통이 과소평가돼서는 안 되지만, 모든 고통이 동일한 우선순위를 가질 수는 없다. 건보는 개인의 불편을 두루 덜어주는 서비스가 아니라, 사회가 공동으로 감당해야 할 '위험의 순서'를 정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탈모 급여화가 선례가 되면 비만, 여드름, 성형수술까지 건보 빗장을 풀어 달라는 요구가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대통령의 한마디는 무겁다. 그 말 한마디가 행정부 전체를 움직이고, 수천억 원대 예산 배분을 바꾸며, 수백만 명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건강보험은 한 번의 정책 판단이 수십 년간 작동하는 제도인 만큼 더욱 신중해야 한다. 공감의 정치가 필요하지만, 박수의 크기에 따라 정책의 우선순위가 흔들려서는 곤란하다. 탈모와 생존 사이에서 국가는 무엇을 먼저 지켜야 하는지, 그 기준을 분명히 세울 때다.

[심윤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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