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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시장 대목인 겨울 시즌엔 통상 대형 뮤지컬 신작에 이목이 쏠리지만, 지금 공연계 최고 화제작은 지난 2일 개막한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2026년 3월 2일까지)다. ‘라이브 온 스테이지’라는 수식어를 달고 티켓 예매처에서 뮤지컬 장르에 편입됐고, 최근까지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를 공연했던 1200석 대극장 GS아트센터에 입성했다. 티켓 최고가도 16만원으로 대형 뮤지컬 수준이다. 내년 초 내한하는 일본 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26년 1월 7일~3월 22일) 오리지널 투어도 뮤지컬로 분류, 최고가 19만원으로 책정됐다. 공연장은 무려 2300석 규모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인데, 좌석이 없어서 못 판다. 라이브 가창은 없지만 무대미학에 뮤지컬 못잖은 제작비를 투여한 화려한 연극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바야흐로 ‘블록버스터 연극’의 시대가 온 걸까.
태평양 한복판,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배우 박정민(박강현 더블캐스팅). 영화라면 AI로 금세 만들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무대라면? 배경 스크린에 미리 찍어둔 영상으로 처리할 수도 있지만, 박정민은 무대 위에 그대로 있다. 그렇다고 무대를 물바다로 만드는 물량 동원도 아니다. 물 한 방울 튀기지 않고 그를 바다 한가운데 띄우는 건 사람들인데, 박정민이 상대하는 건 대부분 동물이다. 벵갈 호랑이, 오랑우탄, 얼룩말, 줄무늬 하이에나…. 어린이 인형극일까?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 올리비에상과 토니상을 휩쓴 ‘라이프 오브 파이’다.
‘토토로’‘기묘한 이야기’ 등 웨스트엔드 안착
이안 감독의 2012년 영화를 재해석한 무대로, 태평양 한가운데 표류하는 소년과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생존기다. 영화가 최첨단 CG기술로 100% 디지털 호랑이를 털 한 올까지 생생하게 구현해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받았다면, 연극은 나무와 스펀지로 만든 호랑이에게 인간의 노동으로 생명을 불어넣는다. 머리와 심장, 다리를 담당하는 세 명의 퍼펫티어(puppeteer·인형을 부리는 사람)가 마치 샴쌍둥이처럼 서로 의존하며 호랑이를 움직이는데, 숨지 않는 게 핵심이다. 일본의 전통 인형극 분라쿠처럼 노골적인 노출로 인간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예술적 퍼포먼스 그 자체다. 2022년 올리비에상 남우조연상을 총 7명의 호랑이 퍼펫 연기팀이 수상하기도 했다.
스크린 투 스테이지
공연시장 대목인 겨울 시즌엔 통상 대형 뮤지컬 신작에 이목이 쏠리지만, 지금 공연계 최고 화제작은 지난 2일 개막한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2026년 3월 2일까지)다. ‘라이브 온 스테이지’라는 수식어를 달고 티켓 예매처에서 뮤지컬 장르에 편입됐고, 최근까지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를 공연했던 1200석 대극장 GS아트센터에 입성했다. 티켓 최고가도 16만원으로 대형 뮤지컬 수준이다. 내년 초 내한하는 일본 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26년 1월 7일~3월 22일) 오리지널 투어도 뮤지컬로 분류, 최고가 19만원으로 책정됐다. 공연장은 무려 2300석 규모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인데, 좌석이 없어서 못 판다. 라이브 가창은 없지만 무대미학에 뮤지컬 못잖은 제작비를 투여한 화려한 연극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바야흐로 ‘블록버스터 연극’의 시대가 온 걸까.
태평양 한복판,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배우 박정민(박강현 더블캐스팅). 영화라면 AI로 금세 만들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무대라면? 배경 스크린에 미리 찍어둔 영상으로 처리할 수도 있지만, 박정민은 무대 위에 그대로 있다. 그렇다고 무대를 물바다로 만드는 물량 동원도 아니다. 물 한 방울 튀기지 않고 그를 바다 한가운데 띄우는 건 사람들인데, 박정민이 상대하는 건 대부분 동물이다. 벵갈 호랑이, 오랑우탄, 얼룩말, 줄무늬 하이에나…. 어린이 인형극일까?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 올리비에상과 토니상을 휩쓴 ‘라이프 오브 파이’다.
‘토토로’‘기묘한 이야기’ 등 웨스트엔드 안착
연말 공연계 최고 화제작 ‘라이프 오브 파이’. 영화의 스펙터클을 아날로그 메커니즘으로 구현했다. [사진 에스앤코] |
이안 감독의 2012년 영화를 재해석한 무대로, 태평양 한가운데 표류하는 소년과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생존기다. 영화가 최첨단 CG기술로 100% 디지털 호랑이를 털 한 올까지 생생하게 구현해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받았다면, 연극은 나무와 스펀지로 만든 호랑이에게 인간의 노동으로 생명을 불어넣는다. 머리와 심장, 다리를 담당하는 세 명의 퍼펫티어(puppeteer·인형을 부리는 사람)가 마치 샴쌍둥이처럼 서로 의존하며 호랑이를 움직이는데, 숨지 않는 게 핵심이다. 일본의 전통 인형극 분라쿠처럼 노골적인 노출로 인간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예술적 퍼포먼스 그 자체다. 2022년 올리비에상 남우조연상을 총 7명의 호랑이 퍼펫 연기팀이 수상하기도 했다.
대자연도 인간의 몸으로 만든다. 프로젝션 매핑이나 조명과 영상의 동기화 같은 첨단기술도 있지만, 빛과 색채의 파동에 배우의 움직임이 일치될 때 바다가 완성된다. 박정민의 몸을 여러 명이 들어올려 너울너울 움직이며 파도를 일으키고, 물 위를 나는 날치떼도 낚싯줄에 매달아 직접 움직인다. 큰 나무도 배우들이 등을 맞대고 나뭇가지를 들어 올려 만든다. 특수효과로 완벽한 환상을 구현하는 게 아니라 관객의 상상력을 부르는 것이다. 퇴장도 거의 없이 내내 무대를 지키는 박정민도 “오랜만에 영화와 전혀 다른 접근방식의 무대를 하게 되어 재미있다”면서 “학교에서 배웠던 무대 위의 마법이 실제로 펼쳐지는 게 근사하더라. 최신기술보다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구현하려 하고, 우리가 표현하려고 하는 것을 보는 사람도 믿어줄 때 진짜 ‘매직’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년초 내한하는 일본 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지브리 스튜디오의 아날로그 철학이 오롯한 무대다. [사진 CJ ENM]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22)도 일본 제작사 도호(東宝)가 지브리 애니메이션 정신 그대로 ‘디지털 프리’를 선언했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만들었던 존 케어드 연출은 사람들이 합을 맞추는 고전적인 무대 기법으로 탐욕스런 물질만능의 세상을 순수함으로 헤쳐나가는 소녀의 모험을 구현한다. 그 아날로그 메커니즘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닮았다. ‘가오나시’가 탐욕에 젖어 사람을 삼킬수록 여러 명을 끌어안고 거대한 천 아래로 사라지며 몸집을 불린다. 용으로 변한 ‘하쿠’가 하늘을 나는 장면은 중국의 전통공연 ‘용춤’을 차용해 배우들이 무대 위를 질주한다. 거미 요괴 ‘카마지’의 다리 6개도 뒤에 붙은 사람들이 하나씩 움직인다.
영국 국립극장의 연극 ‘워 호스’. [중앙포토] |
인형을 이용하거나 텍스트보다 배우의 신체 움직임에 포커싱한 무대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순수연극의 실험적 시도였다. 영국 국립극장의 ‘워 호스’(2007)와 ‘제인 에어’(2014), 사이먼 맥버니가 이끄는 전위적 단체 컴플리시테의 신체극 ‘라이언보이’(2013) 등은 국내에도 소개됐었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퍼펫 디렉터 핀 콜드웰도 참여했던 ‘워 호스’는 진짜 말보다 더 말 같은 퍼펫 연출로 충격을 던졌고, ‘제인 에어’는 텅 빈 무대에서 7명의 1인 다역 배우들이 칙칙폭폭 달리는 기차가 됐다가 사각 프레임 하나씩 들고 창문도 만들다 난롯불, 바람, 제인의 독백까지 되며 아날로그 메커니즘의 정수를 보여줬다. 국내서도 극단 여행자의 ‘더 정글북’(2015) 등이 비슷한 시도를 했다.
연극 ‘기묘한 이야기: 첫번째 그림자’. [중앙포토] |
이런 전위적 실험을 ‘스크린 투 스테이지’ 상업극이 적극 수용한 게 요즘 세계적인 트렌드다. 스크린의 스펙터클을 무대로 옮긴 블록버스터 연극의 시초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2016)는 런던·뉴욕·도쿄 등에서 지금까지 롱런하며 연극의 무한한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가 만든 지브리 원작 ‘이웃집 토토로’(2022)도 웨스트엔드에 안착했고,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의 프리퀄인 웨스트엔드 연극 ‘기묘한 이야기: 첫 번째 그림자’(2023)도 독보적 몰입감으로 인기를 끌어 최근 브로드웨이 밀리언달러 클럽에도 입성했다. 한국에 상륙한 ‘라이프 오브 파이’도 2019년 초연 이래 현재까지 월드 투어 중이고, ‘센과 치히로’도 런던과 상하이 장기 공연에 성공하고 서울에 온다.
연극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중앙포토] |
이런 무대는 영화의 판타지를 관객의 눈앞에서 구현하는 게 핵심이다. ‘해리포터’에도 마술 뿐 아니라 관객의 상상력을 요구하는 아날로그 메커니즘이 가득하다. 시간을 뒤틀어 버리는 ‘타임터너’가 작동할 때 앙상블 배우들이 일제히 검은 망토자락을 휘날리는 격렬한 안무로 무대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착시를 만들고, 킹스크로스역이나 기차 내부도 기차 세트 하나 없이 배우들이 들고 있는 여행가방으로 조립한다.
영화산업의 침체 속에 블록버스터 연극이 공연시장을 키우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AI 숏폼 동영상 시대에 대한 반동인지, 영화시장과 공연시장의 매출액 역전 추세는 가속일로다. 올 상반기 이미 공연(7000억원)과 영화(3900억원) 매출액 격차가 3000억원 이상 벌어졌다. 영화관보다 공연장에 대한 관객의 기대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고가 티켓은 진입 장벽이 아니라 명품 퀄리티를 인증하는 프리미엄 전략이 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 무대를 넓은 시야로 즐기는 2층 파노라마석(16만원), 무대와 가까워 퍼펫의 섬세한 움직임을 볼 수 있는 포커스석(14만원)을 구분한 판매 방식도 관전 포인트를 제시한다. 하나의 환상을 만들기 위해 수십 명의 사람이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걸 보라는 의미다.
관객도 완성된 판타지가 아니라 그 환상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의 노력이 드러나는 현장을 공유하기 위해 돈을 쓴다. 박정민도 “나도 그렇지만 결국 관객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무대 속에 들어가고 싶어서 돈을 내고 극장에 간다. 이런 시대에 전통적 표현방식이 오히려 낯설게 보일지라도, 그걸 극복하고 몰입하는 데서 더 큰 감동과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술이 완벽한 가짜를 만들어낼수록 관객은 오히려 불완전하고 노동이 보이는 실물을 통해 진정성을 느낀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승연 뮤지컬평론가는 “AI 테크놀로지가 무대까지 확장되고 있지만 오히려 관객들은 배우들의 땀방울을 보고 싶어한다”면서 “인간의 노동과 신체성을 드러내는 아날로그적 스펙터클이야말로 무대만의 대체불가능한 미학적 가치”라고 말했다.
공연 매출, 영화 역전… 상반기 3000억 격차
블록버스터 연극이 국내 예매처에서 뮤지컬로 분류되면서 논란도 있다. 고가 티켓을 팔기 위한 제작사들의 꼼수란 것이다. 전체 매출의 70%를 뮤지컬이 차지하는 국내 공연시장에서 연극은 대학로 소극장이나 공공기관 중심 저가시장이라는 인식이 강한 게 사실이다. 고희경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은 “연극은 가난하다는 통념이 문제”라면서 “한국에선 연극과 뮤지컬 관객이 분리되고 이런 공식적인 상업극에 대한 인식이 아예 없으니 비싼 티켓을 뮤지컬 관객에게 팔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조승우의 ‘햄릿’, 전도연의 ‘벚꽃동산’, 이영애의 ‘헤다 가블러’, 엄기준의 ‘시련’ 등 몇 년 새 매체 스타를 앞세운 10만~12만원대 고가 연극도 나오긴 했다. 그런데 뮤지컬 최고가 수준으로 퀀텀점프한 ‘라이프 오브 파이’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제작사들이 ‘라이브 온 스테이지’ 같은 낯선 수식어를 동원해 새로운 카테고리로 포지셔닝하는 중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 신동원 프로듀서는 “‘라이프 오브 파이’는 다양한 무대 장치를 통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독창적 형식을 갖추고 있기에 뮤지컬이나 연극이라는 정형화된 틀 안에 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시상식에서는 어떻게 분류될까. 일단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내년 1월 19일 열리는 한국뮤지컬어워즈에 출품되지 않았다. 고희경 교수는 “올리비에상도 토니상도 당연히 연극으로 상을 줬다. 우리는 왜 연극으로 분류하지 못했나의 문제”라면서 한국에서 연극에 대한 인식의 협소함을 아쉬워했다. 그는 “브로드웨이·웨스트엔드에선 연극이나 뮤지컬이 똑같이 비싸고 멋진 것이라 여겨진다. 매우 아날로그적이면서도 첨단인 것에 대한 니즈가 분명히 있고 아날로그가 훨씬 더 비싸진 세상이다. 사람들이 즐겁게 보면서 의미도 있고 잘 만든 연극에 앞으로 더 큰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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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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