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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익태 곡 애국가 채택 [김정한의 역사&오늘]

뉴스1 김정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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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2월 20일



애국가 가사 (출처: Yun Chi-ho, 1945,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애국가 가사 (출처: Yun Chi-ho, 1945,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40년 12월 20일,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무위원회 의결을 통해 유럽에서 활동 중인 음악가 안익태가 작곡한 선율을 '애국가'의 공식 악보로 채택했다.

당시 우리 민족은 독립의 염원을 담아 애국가를 불러왔으나, 그 바탕이 된 선율은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이었다. 이별의 노래에 독립의 의지를 얹어 불러야 했던 역설적 상황은 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아쉬움으로 남았다.

안익태는 1930년대 중반 한국의 유규한 역사와 독립의지를 담은 '한국환상곡'을 작곡하면서 그 안에 애국가를 삽입했다. 임시정부가 이 곡을 공식 승인한 것은 외세의 흔적을 지우고 온전한 '우리만의 노래'를 갖겠다는 주권 의지의 표현이었다.

애국가 채택은 임시정부가 충칭에 정착하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며 본격적인 대일 항전을 준비하는 시점과 맞물려 있었다. 전시에 군대를 창설하고 국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민족을 하나로 묶을 강력한 상징물로서 '국가'(國歌)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안익태의 애국가는 1941년 광복군 창설식에서 공식적으로 제창됐다.

새로운 애국가는 비장미와 희망이 교차하는 선율을 통해 독립군들에게는 필승의 신념을, 고난 속에 있는 동포들에게는 해방의 확신을 심어줬다. 또한 장차 건설될 독립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문화적 독립 선언이기도 했다. 영토를 잃었을지언정 정신과 문화만은 독자적으로 구축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투영됐다.

이후 애국가는 미주 한인 사회와 만주, 연해주, 그리고 국내의 지하 조직까지 전달되어 민족의 공동체 의식을 결속시키는 매개체가 됐다. 애국가는 독립 투쟁의 전환점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바로 세운 역사적 사건이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더불어 애국가는 관습상 국가의 지위를 가지게 됐다.

acene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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