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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저 근대인들이 남긴 흔적 속에 살고 있으니…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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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박종인 기자의 흔적]
그물처럼 얽혀 있는
근대인의 지도

전봉준 재판장, 서광범

서울 종로1가 보신각 건너편에 영풍문고 빌딩이 있다. 그 앞에 전봉준 좌상이 있다. 형무소에 해당하는 전옥서가 여기 있었다. 전봉준은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원래는 목을 베는 참형이어야 했는데 몇 달 전 근대법이 도입되면서 교수형을 당했다. 소송법을 서둘러 입법한 사람은 당시 법부대신 서광범이었다. 서광범은 친일개혁파였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1894년 갑오개혁 때 복귀해 그해 11월 21일(음력) 법부대신에 임명됐다. 그가 내놓은 개혁안에 따라 12월 27일 참형과 능지처사형이 폐지됐다. 민간인 범죄자는 교수형, 군법으로는 총살형만 남겼다.

1894년 음력 7월 12일 갑오개혁 정부는 의금부를 의금사로 개칭하고 그 장인 의금부 판사를 법부대신이 겸임하도록 했다. 법부대신 서광범은 의금사를 임시재판소로 바꾸고 단심제로 운영했다.(1894년 음 7월 12일, 음 12월 16일 ‘고종실록’) 전봉준은 바로 이 임시재판소에서 1895년 음력 3월 29일(양력 4월 23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장은 당연직인 법부대신 서광범이었다. 처형은 다음 날 새벽 2시에 있었다. 최초의 근대적 ‘교수형’이다.

전봉준에게 적용된 죄명은 ‘대전회통(大典會通)’에 규정된 ‘군복기마작변관문률(軍服騎馬作變官門律)’이었다.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서 관에 대항해 변란을 일으킨 죄였다. 대전회통에는 ‘부대시참’, 즉시 목을 벤다고 규정돼 있다. 형은 넉 달 전 공포된 명에 의해 교수형으로 집행됐다. 부대시, 기다리지 않고 즉각 처형이라는 율법에 따라 바로 형이 집행됐다. 실정법에 있는 행위에 대한 적법한 법 적용과 집행이었다. 시스템으로 공동체를 운영한다는 근대 원칙이 적용된 사례였다.

훗날 최시형에 대해서도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됐는데, 그 형을 선고한 사람은 법부대신 조병직이었고, 좌우 배석판사는 주석면과 동학을 촉발한 전 고부군수 조병갑이었다. 법부 민사국장이던 조병갑은 순번 또는 호선에 따라 재판부에 들어갔다. 서광범은 근대 사법제도를 들여놓고 이에 따라 전봉준을 재판하고 처형했다. 최시형도 마찬가지였다.

사법시스템을 만든 근대인들

1898년 겨울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다섯 흉노로 규정하고 처벌을 요구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은 조병식, 민종묵, 유기환, 이기동, 김정근이다.(1898년 11월 12일 ‘고종실록’) 이 가운데 고등재판소에 자진출두한 이기동을 황국협회 회원들이 법부에 난입해 데리고 가는 사건이 벌어졌다.(‘사법품보(을)’13, 1898년 11월 20일) 이틀 뒤 사건을 담당했던 고등재판소 검사가 파면됐다.(1898년 11월 22일 ‘고종실록’) 파면된 검사는 12일 전인 11월 10일 독립협회 관계자들 재판 공판을 담당했던 검사였다. 대명률에 따라 이상재를 비롯한 피고인들은 태 40대를 선고받았다.(1898년 11월 14일 ‘대한제국 관보’)

그 검사가 판결을 책임지는 판사는 아니었지만, 입헌군주제를 운운하던 자들이 말 그대로 ‘법대로’ 재판을 받았으니, 고종의 마음은 불편했을 것이다. 결국 그 즉흥적인 결정은 닷새 뒤 철회됐다.(1898년 11월 27일 ‘고종실록’)


이 당돌한 검사는 법관양성소 1회 수석 졸업생 함태영이다. 함태영은 한 해 전인 1897년 경기도 수원에서 발생한 폭행사건 수사에 파견돼 관찰사를 소환해 조사했다가 관찰사로부터 욕을 먹은 적이 있었다. ‘법에 따른 수사’를 법대로 수행한 이 검사는 그때 낙인이 찍혀 있었다.(1897년 음 5월 12일 ‘승정원일기’)

해가 바뀌고 함태영은 독립협회 회원이던 이승만이 억울하게 구금돼 있다는 보고를 받고 법부에 선처를 요구하는 보고서를 올린다.(‘사법품보(을)’14, 1899년 1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탈옥했다 재수감됐던 이승만은 1899년 7월 27일 평리원 재판소에서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1899년 7월 27일 ‘고종실록’, 8월 1일 ‘대한제국 관보’) 그때 재판장은 김옥균 암살범 홍종우였다. 훗날 이승만은 “내 아버지한테 홍종우가 나를 살려줄 것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여기까지 등장인물들

서광범. 친일개화파다. 전봉준, 위정척사파다. 흥선대원군을 보좌해 저항한 혐의가 있다. 조병갑은 아무 개념 없는 동시대 전형적인 탐관오리다.


함태영. 한미한 무신 집안에서 근대법을 선택해 전문 법조인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훗날 그가 접한 기독교적 세계관은 이 땅에 근대를 착근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홍종우. 근황파이면서 근대의 물을 접한 개화파였다. 고종을 보위하고 김옥균을 죽이고 독립협회를 탄압하면서 근대를 저지했지만 나름대로 구시대적 세계관 속에서 개혁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이승만. 친미 기독교파 근대인으로 대한민국을 향한 길을 만들었다. 얽히고설킨 시대정신의 네트워크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대한제국 지성과 권력 지형도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이 만든 미래에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다.


숱한 여울목들

박성빈이라는 선비는 경상도 동학군 접주였다. 무과에 합격했지만 동학에 동참해 전투를 하다가 생포돼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후 초야에 묻혀 가난하게 살았다. 박성빈에게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둘째 아들은 식민시대에 사회주의 혁명을 꿈꿨다. 해방이 되고 이 아들은 남로당 당원으로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하다가 1946년 10월 대구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그 아들의 동생도 남로당원이었다. 형이 죽고 2년 뒤 국군 내 남로당 조직원으로 체포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사면됐다.


노상에서 총에 맞아 죽은 사람 이름은 박상희다. 그 동생 박정희는 훗날 대통령이 됐다. 박정희는 5·16을 역사적 맥락에 놓기 위해 동학에서 ‘난동’ 꼬리를 떼고 ‘혁명’이라고 명명했다. 구한말 의병장 최익현은 동학을 비적이라고 불렀다. 안중근은 동학을 폭동이라 규정하고 황해도에서 동학군을 토벌했다. 1907년 1대 교주 최제우와 2대 교주 최시형의 죄를 없애고 사면을 고종에게 요청한 사람은 총리대신 이완용이었다. 이렇게 모두가 그물처럼 얽혀 있다.

근대인 지석영

그 그물은 상상보다 더 촘촘하다. 종두법을 조선에 도입한 사람은 지석영이다. 이 지석영을 중심으로 또 그물 같은 지성인 네트워크가 등장한다.

지석영에게 종두법이라는 실체를 알려준 사람은 박영선이라는 사람이다. 박영선은 1876년 1차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갔던 사람이다. 일행 가운데 한 명이 병이 나서 왕진 온 의사에게 치료를 받다가 종두법 얘기를 듣게 됐다. 박영선은 곧바로 그 의사를 따라 병원으로 가서 종두법 개요를 듣고 책과 접종할 수 있는 종두를 얻었다. 병원 이름은 준텐도(順天堂)다. 박영선이 한탄한다. “이걸 받은들 조선에서는 쓸 수가 없네.” 그러고 귀국해서 제자인 지석영에게 책을 주고 종두법을 배우라고 권유했다.

1879년 지석영 조카딸이 천연두로 죽었다. 그해 10월 지석영은 일본 사람이 많이 사는 동래로 내려갔다. 동래에는 1877년 일본이 만든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생병원’이 있었다. 무조건 종두법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일본 해군 군의 도쓰카 세키사이(戶塚積齋)가 종두법을 가르쳤다. 두 달 뒤 지석영이 처가가 있는 충주로 갔다. 장인에게 읍소해서 어린 처남한테 우두를 접종했다. 나흘 만에 우두 딱지가 앉았다. 지석영이 회상했다. “과거 급제 때와 귀양살이에서 풀려온 때도 기뻤지만 이때 기쁨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네.”(1931년 1월 25일 ‘매일신보’)

그리고 이듬해 재차 일본에 가서 종두 제조법을 배웠다. 귀국해서 서울에 종두장을 만들고 종두법을 전파했다. 1882년 전라도와 충청도에 파견된 암행어사 박영교와 이용호가 지석영을 초빙해 자기네 도에 종두 접종을 실시했다. 이때 지석영은 개화파로 낙인찍혔다.

지석영은 이듬해 과거에 응시해 급제했다. 1887년 사헌부 장령으로 일하던 때, 수구파들이 “박영효와 짜고 정변 준비하고, 종두라는 정체 불명체 생산 핑계로 박영교와 당을 꾸민 놈”이라며 처단을 요구했다. 지석영은 유배됐다.

1894년 갑오개혁 정부 형조참의 지석영이 “무당 진령군 참수하라”고 상소했다. 고종은 지석영을 동학 토벌대장으로 임명해 바깥으로 내몰았다. 토포사 지석영은 숱한 동학군을 체포하고 처형했다.(이두황, ‘양호우선봉일기’3 1894년 12월) 1898년 지석영은 또 황해도로 유배됐다. 이번에는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한 혐의가 씌워졌다.

1899년 고종은 지석영을 대한의학교 교장에 임명했다. 학교는 아관파천 때 고종 명으로 노변 처형당한 관훈동 김홍집 집터에 설립됐다. 1902년 고종은 지석영에게 천연두 퇴치 공로 훈장을 내렸다. 1909년 지석영은 안중근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 추도문을 읽었다. 지금 지석영은 그 추도문을 읽은 대가로 2003년 대한민국 과학기술부가 선정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서 탈락했다.


근대인의 흔적들

지석영에게 천연두를 공부하라고 한 박영선은 1882년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조선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창간할 때 공동 작업자였다. 박영선은 강위라는 사람이 만든 육교시사라는 단체 멤버였다. 강위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조선 측 통역가였다. 지석영을 2차 수신사에 끼워 보낸 사람은 김옥균이다. 김옥균은 “제조법을 꼭 배워 오라”고 신신당부했다. 강위는 추사 김정희 제자였다. 김정희가 죽고 팔도를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과 교류했다. 대표적인 친구들은 오경석·최한기·유대치·김정호·박규수·이동인 등이다.

박규수가 길러낸 사람은 북촌 5인방이다.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재필·서광범. 갑신정변 주모자들이다. 박영선·강위와 함께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를 만든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이 갑신정변에 폭탄조로 투입됐다. 이노우에 가쿠고로에게 신문을 만들라고 권한 사람은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후쿠자와에게 근대를 배웠다. 강위와 친했던 승려 이동인은 이 북촌 5인방에게 근대를 알려준 사람이다. 강위와 함께 한성순보를 만들던 우시바 다쿠조는 지지부진한 창간 준비에 지쳐 귀국했다. 그때 조선 청년 17명을 데려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만든 게이오의숙에 입학시켰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졸업생 상당수가 갑신정변에 참가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서재필이다.

1894년 김옥균이 청나라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될 때 김옥균을 따르던 일본 청년이 있었다. 이름은 미야자키 도텐이다. 김옥균이 이홍장을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가 거절당했다. 며칠 뒤 김옥균 암살 소식에 미야자키는 통곡했다. 그리고 청나라로 가서 쑨원을 도와 신해혁명에 헌신했다. 근대를 맞아 조선도 정체돼 있지만은 않았다. 각성한 근대인들이 있었다. 그 흔적 속에 우리가 산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박종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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