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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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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박준의 마음쓰기] (41)
일러스트=유현호

일러스트=유현호


이사를 하면서 한동안 대중교통과 담을 쌓고 살았다. 새로 조성된 동네라 그런지 집 근처 정류장을 지나는 버스 노선은 턱없이 적고, 지하철역도 비교적 멀기 때문이다. 다행히 인접한 간선도로가 있어 혼잡 시간대만 피한다면 어딘가로 이동하는 일에는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저녁 약속이 있는 날에는 택시를 호출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자연히 버스나 지하철과 멀어졌다. 편히 전화 통화를 하거나 노트북을 펼쳐 업무를 볼 수도 없으니, 어쩌면 시간을 비효율적으로 쓰는 셈이라고도 생각했다.

스스로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해외에서의 일이다. 일본과 중국을 연달아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두 곳 모두 여정을 함께할 현지인 친구가 있었다.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는 그들의 공통된 질문에 “딱히 없지만 다만 이동할 때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싶다”고 나는 답했다. 운임을 어떻게 지불해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고, 길을 헤맬 우려도 없었으니 그곳에서의 대중교통은 곧 관광이 됐다. 낯선 거리, 뭘 파는 상점인지 알 듯 모를 듯한 간판, 그리고 사람들. 내게는 그 장면들이 유명 박물관이나 미술관보다 흥미롭게 다가왔다.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자 국내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울산과 제주와 김해. 평소라면 역이나 공항에 내려 줄지어 서 있는 택시를 타고 이동했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이라면 어디든 여행지가 될 수 있으니까. 여정을 시작하기 전 짧은 시간을 들여 역이나 공항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대중교통편을 검색했다. 당연히 운임은 어떻게 내야 하나, 길을 헤매지는 않을까 같은 걱정은 없었다. 정 모르겠으면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울산에서는 버스를 세 번이나 탔고 제주에서는 급행버스로 서귀포까지 이동했다. 김해에서는 신문에서나 보던 경전철을 타고 놀이공원에 온 듯 신났다. 그곳에 사는 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낯선 삶을 사는 기분을 잠시 느끼기도 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대중교통 애호가였다. 본인이 직접 차를 소유한 시절에도 운전보다는 버스나 지하철을 선호했다. 나이가 들어 운전면허를 반납한 후에도 차로 모셔다 드리겠다는 내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다. 한번은 답답한 마음에 연유를 물은 적이 있다. 이후 아버지의 답변에 영감을 받아 아래와 같은 시를 쓴 적이 있다. 이제야 새삼 느낀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반갑게 만났을까. 아버지는 얼마나 신났을까.

“멀쩡한 승용차를 집에 두고 왜 새벽 열차를 기다리고 버스로 환승까지 하며 출근하는 것인지 아버지에게 물은 적이 있다 대중교통을 타면 오래 만나지 못한 이와 우연히 마주칠 것만 같다고 아버지가 답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실제로 생긴다면 참 반갑지 않겠냐고 아버지가 되물었다.”(시 ‘만약에’)

※1월부터 B8면으로 옮겨 4주 간격으로 연재합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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