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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비빔밥[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21〉

동아일보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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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실화이자 로망. 새벽에는 참 좋다.

무엇이든지 목넘김이 즐겁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한낮보다 개키지 못한 이불은 성마르게 습기를 머금는다.

어떤 것도 하지 못할 목마름. 나는 나물이 먹고 싶다. 그보다는

나물같이 후루룩 마셔버리는 게 낫겠다 싶은 거다.

기억

비빔의 효용성

우리는 정교한 거짓말을 사랑한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의미 없는 반찬들로 이루어진 암호화된 슬픔.

여기엔 늘 정성이 필요했다. 식별 불가한 숟가락질을 하면서도

여자들은 대체 왜 불 꺼진 주방 한구석에 쪼그려앉아

양푼을 끌어안고 있는 걸까.

이유에 도달할 수 없다.

(후략)

―박유빈(2000∼ )



제목(‘한국 여성들은 왜 꼭두새벽 비빔밥을 먹는가’)을 보자마자 감탄했다. 그러게, 한국 여성들은 왜 꼭두새벽에 비빔밥을 먹을까? 아니 꼭 그렇지 않더라도 어디 점잖은 척해야 하는 자리에 다녀온 늦은 저녁이나 ‘뒤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시달리고 돌아온 한밤중에, 한국 여성들은 왜 양푼에 나물을 푹푹 넣고 식은 밥을 쓱쓱 비벼 먹고 싶은가 말이다. 중요한 건 먹는 행위가 아니다. 먹든 안 먹든,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든 상관없다. ‘이 기분’을 모르는 한국 여성이 있는가 말이다!

2000년생 시인 박유빈의 첫 시집, 그것도 맨 첫자리에 놓인 이 시는 의미심장하다. “의미 없는 반찬들로 이루어진 암호화된 슬픔”을 정성을 들여 해독해 보려는 마음, 탐구자의 결기가 보인다. 물론 “이유에 도달할 수” 없다. 이유를 알 필요도 없다.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꾸역꾸역 비빔밥을 삼키는 여성들을 잠시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지면상 시의 뒷부분을 다 소개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 꼭 찾아 읽어 보시길. 빛나는 신인이 탄생했다.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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