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스토리227번째 ‘리어왕’ 공연인데, 평생 셰익스피어극 주인공만 해온 ‘선생님’(박근형·오른쪽)이 대사를 전부 잊어버렸다. 그 곁을 지켜온 드레서(의상 담당) ‘노먼’(송승환)이 수습에 나선다. 27일 개막을 앞둔 연극 ‘더 드레서’ 연습 장면. |
2차 대전 중인 영국, 셰익스피어 전문 극단에서 평생 주인공만 하며 늙어온 ‘선생님’(박근형·정동환)은 ‘리어왕’ 개막 40분을 앞두고 대사를 몽땅 잊어버린다. 설상가상 공습 경보에 폭격이 이어지고, 오래 선생님의 손발 역할을 해온 드레서(의상 담당) ‘노먼’(송승환·오만석)이 수습에 나서지만 극장은 대혼돈에 빠진다.
27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개막하는 연극 ‘더 드레서’ 속 사람들은 어쩐지 이런저런 위기와 재난 앞에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는 지금 우리 모습을 닮았다. 2020년 초연 이후 줄곧 ‘선생님’을 연기했던 송승환(68)은 처음 ‘노먼’을 맡는다. 송승환은 “이 공연을 다시 한다면 다르게 해보고 싶었다. 내가 ‘노먼’을 한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선생님’은 박근형(85) 선생님과 정동환(76) 형을 떠올렸다”고 했다. 박근형과 송승환을 최근 연습실이 있는 서울 대학로에서 만났다.
◇열한 살 소년, 스물여덟 청년의 첫 만남
박근형은 67년, 송승환은 60년의 연기 경력인데, 놀랍게도 두 사람이 함께 연기하는 건 처음이다. 첫 인연을 묻자 송승환이 1968년 동아연극상 시상식 사진을 꺼냈다. 당시 남자 연기상을 받은 스물여덟 청년 박근형과 아역상이 없어 특별상을 대신 받은 열한 살 까까머리 소년 송승환이 있었다. “57년 만에 무대에서 만났네요.” 백발 성성한 두 배우가 웃었다.
송승환 제공1968년 동아연극상 시상식, 남자 연기상을 받은 박근형(오른쪽·당시 28세)과 특별상을 받은 소년 송승환(당시 11세). |
송승환은 ‘웃음의 대학’ 등 최근 연극에서도 그가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앞을 거의 보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대형 화면 태블릿 PC에 글자 하나를 꽉 채울 만큼 확대해야 겨우 식별할 정도의 시력만 남았다. 그는 “나이 들어 찾아온 병이라 진행 속도가 느려 다행”이라고 했다. “소품이나 배우 위치는 이미 익숙하니까요. 요즘은 ‘노먼’이 아닌 ‘선생님’ 쪽으로 동영상을 찍고, 나중에 확대해서 들여다봐요. 대사 암기하듯 상대 배우 리액션을 외워두는 거죠.”
◇박 “연기, 이제야 어렴풋이 보여”
박근형은 신구(89)와 함께 31개 도시, 139회 공연 모두 매진을 기록한 ‘고도를 기다리며’ 이후에도 쉼 없이 무대에 서고 있다. 지난달 16일까지도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를 공연했다. 그는 “60대 후반이 돼서야 어렴풋이 배우로서 연기 기술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한 것 같다”고 했다. 송승환은 “배우는 아무래도 자기 역할 중심으로 보는데, 노먼 입장에서 선생님을 보며 내가 할 때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노먼이 드레서라지만 사실 하인 같잖아요. 나는 전생에 하인이었나 봐. 너무 잘 맞아, 하하.”
연극 도입부에는 ‘선생님’이 유서처럼 쓴 노트가 등장한다. 지문엔 “‘나의 삶’ 아래는 비었다”고 써 있다.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그 첫 줄을 뭐라 쓸 수 있을까. 박근형은 “쓸 말이 없을 것 같다. 살아온 게 거창한 것 같지만 남는 건 서운함”이라고 했다. “극중 선생님은 227번째 리어왕을 하고, 수백 번을 연습했는데도 첫 대사를 잊어버려요. 우리는 그렇게 손에 든 것 없이 스러져 가지요. 끝내 이루지 못한 어떤 것, 그런 모습이 담긴 연극이에요.” 송승환은 “‘감사하다’고 쓰겠다”고 했다. “연극은 혼자 못 해요. 사람 때문에 힘들 때도 많았어요. 지금은 모두에게 고마워요. 정말 늘 모두에게 신세를 많이 져요.”
◇“227번 ‘리어왕’ 해도 대사 잊는 게 연극”
그럼 상대방의 노트 첫 줄을 써준다면? 박근형은 송승환의 노트에 “‘위대하다’고 쓰고 싶다”고 했다. “앞을 못 본다는 걸 전혀 못 느낀 채 함께 연습하다 보면 신비롭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생각도 위대하고 실천도 위대한 사람이에요. 신체적 결함을 딛고 일어서는 것까지.”
두 사람에게 ‘퇴장’은 여전히 먼 얘기다. 송승환은 “무대에서 죽고 싶진 않은데, 연기하고 공연 만드는 이 일을 계속하다 갔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후배들에게 ‘더 늙어 몸을 잘 못 움직이게 되면 이 연극의 늙은 광대 ‘제프리’ 역을 할 거야’라고 농담처럼 말합니다.” 박근형은 “이 연극 자체가 선생님이 퇴장하라는 말을 안 들어서 생기는 일”이라며 웃었다. “퇴장이라는 게 본인 의지로는 절대 안 하는 거예요. 이렇게 오래 연기를 하면서 이제야 겨우 뭔가 알기 시작했는걸요. 할 수 있는 한 계속 가야죠!”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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