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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문화유랑]다정함은 우리 시대의 펑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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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이방인이고, 밤의 여행자들이다.’ 하룻밤 머물 공간을 내어줄 배려와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줄 다정함이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가족이 될 수 있다. 지난 17일 개봉한 <파리, 밤의 여행자들>(2022)이 건네는 메시지다.

1980년대 파리,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엘리자베트는 10대의 남매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출산과 유방암 투병으로 경력단절이 된 그는 즐겨 듣던 라디오 심야 방송의 전화교환원으로 일하게 된다. 청취자들이 전화를 걸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DJ와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양육비를 제대로 받지 못한 엘리자베트는, 낮에는 도서관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남편의 배신, 경제적 어려움 등등 가볍지 않은 생활이다.

어느 날, 방송국에 사연을 전하러 온 탈룰라를 집으로 데려온다. 중학교만 졸업하고 가출해 파리에 온 탈룰라는 4년째 집 없이 거리를 떠돌고 있다. 불안하지만 자유로운 탈룰라는 엘리자베트 가족에게 낯설지만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는다. 얼마 후 홀연히 떠난 탈룰라는 4년 만에 돌아온다. 마약에 취한 채로. 탈룰라를 받아들인 엘리자베트는 하나만 요구한다. 마약을 끊을 것. 탈룰라는 다시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다.

1980년대 파리, 엘리자베트 가족과 이방인의 만남을 다정하게 그린 미카엘 허스 감독의 <파리, 밤의 여행자들> 포스터.

1980년대 파리, 엘리자베트 가족과 이방인의 만남을 다정하게 그린 미카엘 허스 감독의 <파리, 밤의 여행자들> 포스터.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다. 힘들고 어려운 날들이지만 스스로 비하하거나 침울함에 빠지지 않고, 서로에게 의지하고 가능한 선의를 베풀며 작은 행복을 만들어가는 이야기. 엘리자베트는 탈룰라에게 ‘원하는 만큼 머물라’고 말할 뿐, 다른 것을 묻지 않는다. 커다란 희생은 아니지만, 지금 나눌 수 있는 만큼을 대가 없이 건넨다.

엘리자베트와 남매의 관계도 유연하다. 사회운동을 하며 정치인을 꿈꾸는 딸과 시인이 되려는 아들. 엘리자베트는 그들의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지만,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묵묵히 지켜보고, 필요할 때 지원한다.

<파리, 밤의 여행자들>은 목적지보다 여정 그 자체가 더 중요한 영화다. 극적인 사건보다 일상의 온기와 연대로 이어지는 작은 순간들에 집중한다. 치밀한 디테일과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절제된 연기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온한 공기를 느끼게 한다.


엘리자베트 가족, 라디오 심야 방송의 스태프들, 도서관의 동료, 뒤늦게 만난 연하의 연인까지 영화 속 인물 모두, 서로에게 ‘힘들 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다. 힘든 삶 속에서도 서로를 비난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귀 기울여 경청하고, 손을 내밀며 함께 있어 준다. 우리는 모두 작고 약한 존재이지만, 서로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들어줄 때 비로소 세계의 일부가 되고,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된다.

영화를 보며, 지난 칸국제영화제에서 <센티멘탈 밸류>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의 ‘다정함은 새로운 저항의 방식이다(Tenderness is the new punk)’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다정함이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 화해할 수 있다는 감각을 믿어야 한다. 극단화, 분노, 마초성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우리는 분열과 양극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국가와 민족, 정치적 이념은 물론이고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나 예술과 대중문화를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서도, 나와 다른 생각과 판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행동을 하는 타인에 대해 공격적이고 비아냥거리는 태도와 행동이 일상인 시대에 ‘다정함’은 분명 저항의 성격을 띤다. 지금 다정함은 개인의 성품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고 화해의 가능성을 믿겠다는 정치적 태도에 가깝다. 요아킴 트리에르는 분노보다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이 더 용기 있는 태도라고도 말했다. 무조건 남을 이기려고 허세를 부리기보다는,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서로의 입장을 마주하는 데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엘리자베트 가족의 작은 일상이 다정하고 평온한 것은, 그들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엘리자베트와 탈룰라, 라디오 청취자와 스태프가 만들어내는 작은 연대의 장면 속에서, 다정함이 어떻게 일상의 공간을 변화시키는지 볼 수 있었다. <파리, 밤의 여행자들>을 보고, 분노와 양극화가 지배하는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신했다. 다정함이 우리 시대의 펑크다. 가장 급진적이고, 가장 파괴적인 저항이다.

김봉석 문화평론가

김봉석 문화평론가

김봉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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