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에 칼럼을 써온 지 어느덧 8년. 오늘이 마지막 글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회학자의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 여기저기 만병통치약을 파는 거짓 구세주가 많다. 어떤 이는 “문제는 경제야!”라고 선동하며 정치를 먹고사는 문제로 쪼그라트린다. 다른 이는 “문제는 너야!”라고 선동하며 사회적 삶을 개인의 자기계발 문제로 가둔다. 경제성장과 자기계발에 성공하면 모든 문제가 단박에 해결될 거라고 속인다. 이와 달리 사회학은 사회의 ‘연대’를 최우선에 둔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성원이 함께 ‘좋은 삶’을 누릴 수 있을까? 묻는다. 왜 전 세계에 ‘극우’가 사회의 연대를 해치는 주된 세력으로 떠올랐는가?
여러 설명이 있다. 그중에서 지난 40여년 동안 실행한 신자유주의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는 설명이 힘을 얻고 있다. 사실 1990년대 이전까지 파시즘 연구와 동의어인 극우 연구는 서구 자유민주주의 학계에서 인기가 없었다. 군사주의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파시즘이 다시 발흥하리라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 극우 정당과 운동단체가 일국적 차원에서 주류 세력으로 부상했다.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극우 세력이 초국적 연결망을 형성해 전 세계적으로 힘을 얻게 되었다. 극우가 좁은 의미의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보편적 연대의 문제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세계를 휩쓸어온 신자유주의의 여파에 주목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에크는 1차 세계대전 후 히틀러가 집권해나가는 독일의 상황이 1930~1940년대 영국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둘 다 자유주의를 경멸하고 사회주의를 채택했다. 독일에서는 나치즘이 부상했다. 사회주의의 고귀한 이상에 따라 미래를 의식적으로 만들어가려는 노력이 정반대의 비극으로 치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당대 영국에서 나치즘에 버금가는 전체주의가 나타나리라는 것은 명확한 것 아닌가? 하이에크는 이를 막으려면 원시 공산사회를 본뜬 ‘사회 개념’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 개념은 인위적으로 만든 정의와 질서를 사회적 삶에 강제로 부과한다. 자발적 행위에 기초한 사회질서가 아니라서 전체주의로 귀결한다.
여러 설명이 있다. 그중에서 지난 40여년 동안 실행한 신자유주의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는 설명이 힘을 얻고 있다. 사실 1990년대 이전까지 파시즘 연구와 동의어인 극우 연구는 서구 자유민주주의 학계에서 인기가 없었다. 군사주의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파시즘이 다시 발흥하리라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 극우 정당과 운동단체가 일국적 차원에서 주류 세력으로 부상했다.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극우 세력이 초국적 연결망을 형성해 전 세계적으로 힘을 얻게 되었다. 극우가 좁은 의미의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보편적 연대의 문제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세계를 휩쓸어온 신자유주의의 여파에 주목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에크는 1차 세계대전 후 히틀러가 집권해나가는 독일의 상황이 1930~1940년대 영국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둘 다 자유주의를 경멸하고 사회주의를 채택했다. 독일에서는 나치즘이 부상했다. 사회주의의 고귀한 이상에 따라 미래를 의식적으로 만들어가려는 노력이 정반대의 비극으로 치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당대 영국에서 나치즘에 버금가는 전체주의가 나타나리라는 것은 명확한 것 아닌가? 하이에크는 이를 막으려면 원시 공산사회를 본뜬 ‘사회 개념’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 개념은 인위적으로 만든 정의와 질서를 사회적 삶에 강제로 부과한다. 자발적 행위에 기초한 사회질서가 아니라서 전체주의로 귀결한다.
하이에크를 이어받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원시 공산사회라고 비판받아온 사회 개념을 내다 버렸다. 자본의 제한 없는 활동, 흐름, 축적을 촉진하는 경제정책을 실행했다. 관세와 세금을 낮추고, 산업 규제를 완화하고, 공공재와 서비스를 민영화하고, 복지국가를 축소하고, 조직화한 노동조합의 힘을 뺐다. 일국적 차원에서 신자유주의에 잘 적응한 세력과 피해 본 세력 간의 심대한 분열이 나타났다. 이러한 분열을 자양분 삼아 극우가 자라났다. 극우는 좌파 엘리트가 만든 민주주의가 소수자의 관점에서 평등을 제도화함으로써 오히려 다수자를 차별한다고 주장한다. 다수자의 원형적 정체성을 되찾자고 부르짖으며, 이에 어긋나는 타자를 혐오하고 말살하려 든다.
‘사회주의 이상’을 실천했더니 전체주의와 마주했고, ‘자유주의 이상’을 따라갔더니 극우와 만났다. 두 경우 모두 ‘사회’에 탈이 났다. 사회주의 이상에서는 ‘과잉 도덕화’한 사회가 문제라면, 자유주의 이상에서는 ‘과소 도덕화’한 사회가 문제다. 도덕은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위를 조절하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불러낸 전체주의가 절대화된 국가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위를 조절한다며, 신자유주의가 불러낸 극우는 아예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위를 조절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질화된 정체성을 거울 삼아 자신을 마주할 뿐이다. 사회 자체를 성찰할 일이 줄어든다. 그런 사회가 지속할 리 없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몰아내는 지금, 사회학의 쓸모를 곱씹을 때다. 사회학은 ‘사회 자체’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유일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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