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 벤처중소기업부장 |
출퇴근길 늘 지나는 길목엔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김밥집 세 개가 나란히 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여파로 대부분 가족들이 매달리고 있는 이 가게들은 한 달에 한 번 정기휴무를 제외하고는 새벽 5시에 문을 열고 밤 10시에 문을 닫는다.
기본 김밥값은 동일하지만 어떤 가게는 요구르트 하나를 덤으로 챙겨주고, 어떤 가게는 현금 구매 시 10%를 깎아준다. 야간엔 재고 처리를 위해 식당 주인이 문 앞에서 호객 행위에 나설 때도 있다. 요즘처럼 자영업 폐업이 급증하는 시기에 김밥집 세 곳이 나란히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은 아마도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붙잡기 위한 그들만의 분투 덕분일 것이다.
매일의 삶이 치열한 김밥집을 지날 때면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가 되뇌던 대사가 떠오른다. "언제나 그랬다. 매일 새벽같이 기원에 가는 길에도, 야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아무리 빨리 이 새벽을 맞아도 어김없이 길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들은 아직 꿈속을 헤맬거라 생각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나보다 빠르다."
경제의 실핏줄 역할을 하는 소상인들의 삶을 지나 이제 동맥 역할을 하는 산업계를 보자. 최근 반도체 산업 분야에서 핵심 공급망을 담당하고 있는 한 기업인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한국과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주제로 한 대화가 오갔다. 때마침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한국 10대 수출 주력업종 기업 20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미·일·중 경쟁력 현황' 결과가 나왔던 터였다.
당시 한경협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철강, 일반기계,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자동차·부품 등 5개 업종은 이미 중국이 한국을 추월했다. 반도체, 전기·전자, 선박, 석유화학, 바이오헬스는 현재 한국이 우위지만, 5년 후에는 이마저도 중국이 한국을 추월할 거라는 충격적 전망을 내놨다.
하지만 이날 이 기업인은 '중국이 한국 반도체 산업을 추월하는 데 앞으로 몇 년이 걸릴까'라는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5년 후라고요? 아닙니다. 중국이 한국 반도체 산업을 추월하는 데 이젠 3년도 남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해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미국, 중국 기업을 상대로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이 기업인은 중국이 요구하는 제품 수준을 보면서 이미 한국을 바짝 쫓아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전 세계가 인공지능(AI) 슈퍼사이클에 돌입하면서 한국에선 우리 반도체 산업이 호황을 맞았다며 떠들썩하다. AI 특수 덕에 올해 우리나라의 연간 수출도 사상 첫 7000억달러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반도체를 제외한 나머지 주요 수출 품목은 오히려 지난해 대비 수출 규모가 줄면서 역성장을 하고 있다.
한국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3년 또는 5년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상황에서 국가는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며 발벗고 나서는 게 당연지사일 것이다. 미국과 기술경쟁을 펼치는 중국은 백인계획과 천인계획을 넘어 만인계획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고 있다. 이런 중국에 위협을 느끼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중국식 996 근무(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6일 근무)도 확산하고 있다.
최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중국과 격차가 남은 유일한 산업이라며 어떻게든 지켜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의 희망이라는 반도체 산업은 여전히 주52시간제에 묶여 있다. 반도체 산업이 휘청이면 협력업체를 비롯해 수십만 명의 밥줄이 끊어지는 건 뻔하다. 김밥집도 생존을 위해 죽기 살기로 달리는 시대에 언제까지 꿈속을 헤맬 것인가.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나보다 빠르다.
[이윤재 벤처중소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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