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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용의 물건만담] 스위스 시계 산업을 구원한 ‘가장 얇은 실패작’

조선일보 박찬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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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브레게, 블랑팡, 스와치.

왼쪽부터 브레게, 블랑팡, 스와치.


스위스 비엘에 있는 스와치그룹 본사의 스와치 박물관 한가운데에는 특별한 시계 하나가 별도의 쇼케이스에 놓여 전시된다. 스와치는 저렴한 플라스틱 시계로 유명하나 이 시계는 아주 얇은 금 손목시계다. 이 시계의 이름은 ‘델리리움’. 1979년 출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얇은 손목시계였다. 이 얇은 시계 안에 오늘의 교훈이 들어 있다.

1983년 출시된 스와치는 경쾌한 물건의 분위기와는 달리 무거운 책임을 안고 있었다. 스와치의 탄생 배경이 된 1970년대는 스위스 시계의 암흑기였다. 스위스는 2차 세계대전 특수 이후 손목시계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50% 이상 점유할 정도로 업계를 평정했다. 비결은 높은 기계적 완성도. 수 세기에 걸쳐 축적한 시계 제조업 기술과 네트워크가 국가적 경쟁력이었다. 그런데 이 장점이 스위스의 목을 겨눴다.

시계라는 기계는 역사적으로 ‘더 정확한 시계’라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 정확성 분야에서 중요한 기술이 1960년대에 출시됐다. ‘쿼츠’. 시계의 정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탈진기(脫進機)를 전자화한 장치다. 일본의 세이코가 1969년 세계 최초로 상용화된 쿼츠 무브먼트(시계의 엔진 역할을 하는 부품)를 탑재한 손목시계를 출시했다. 일본 기술사에 이정표 같은 물건이라 일본 과학 박물관에도 전시되어 있다.

이 기술은 스위스에도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스위스 시계 컨소시엄이 공동 개발한 쿼츠 무브먼트 베타 21이 공개되었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보는 관점이었다. 기술의 발전 방향이 있었으니 그때는 더 정확한 시계가 더 비싼 게 당연했다. 그러므로 스위스는 이 귀한 기술을 고급 시계에 적용했다.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세이코는 쿼츠 무브먼트를 대중화해 정확한 시계의 가격을 엄청나게 낮춰버렸다.

이 선택이 업계의 명운을 갈랐다. 일본은 더 정확한 시계를 더 저렴하게 공급하며 스위스 시계 산업을 무너뜨렸다. 1970년대 스위스 시계 업계는 직원 70%를 해고하고 연말 보너스를 주지 못할 정도였다. 독일어권과 프랑스어권에 퍼져 있던 시계 제조사들은 생존을 위해 고통스러운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을 해야 했고 은행권은 격렬한 토론 끝에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통합 시계 제조사가 스와치그룹이다.

경영적 대수술이 끝나도 숙제가 남았다. 지금까지 만들던 시계는 경쟁력이 없는데 무엇을 만들어야 하나? 그때까지도 스위스는 기존 시계 업계의 경쟁에 매몰되어 있었다. 당시 고급 시계의 기준은 둘이었다. 하나가 앞서 언급한 정확한 시계, 다른 하나는 얇은 시계다. 그래서 1979년 세계에서 가장 얇은 손목시계인 델리리움이 만들어졌다. 막상 이 시계는 현실에서 실패했다. 너무 얇아서 실생활에서는 휠 정도로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쓸모없는 기술이 스와치의 뿌리가 되었다. 얇은 시계를 위해 델리리움의 엔지니어들은 시계 케이스와 무브먼트를 일체화했다. 이때의 연구 결과가 스와치의 구조에 적용됐다. 케이스와 무브먼트를 일체화하고 제조 공정을 간소화한 덕에 델리리움은 부품이 51개에 불과했다. 이 ‘일체형 케이스+51개 부품’이라는 구조 덕에 부품이 줄고 제조 공정이 간소화되어 제품 원가도 낮아졌다. 스와치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메이드 인 스위스’ 품질을 구현한 비결이다.

오늘날 스와치는 마케팅과 디자인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사실이지만 마케팅과 디자인만으로 오랫동안 성공할 수는 없다. 제조업은 부가가치가 높을수록 종합 예술에 가까워진다. 제조 역량, 마케팅, 홍보, 브랜딩 등 모든 부문에서 훌륭해야 한다. 그래야 손목시계의 필요성이 상당히 줄어든 21세기에도 스위스인들처럼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값비싼 시계를 팔 수 있다. 스위스 시계의 성공에 강력한 제조업 역량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스와치의 대성공을 바탕으로 스와치그룹은 최고급 손목시계들을 부활시켰다. 그를 반영하듯 11월 출장으로 찾은 스위스 고급 시계 블랑팡 공장에서도 시계 엔지니어는 블랑팡의 고급 시계와 스와치의 시계를 양손에 차고 있었다. 그날 저녁 블랑팡의 마케팅 책임자에게 그 광경을 전했다. 미소 지으며 그가 말했다. “그 저렴한 시계로부터 모든 게 다시 시작된 거예요.” 하나 더. 스와치 손목시계의 부품은 여전히 51개다. 스위스는 역사를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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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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